임산부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해 10월9일 서울 지하철 3호선 전동차 내 임산부 배려석이 비어있다./사진=뉴스1
사실 이 과정에 이르는 것 자체도 험난했다. 지하철 노약자석은 사실상 '경로석'이 돼 있었다. 거기에 앉으려던 몇몇 임산부들과 노인 사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한 노인이 지팡이로 임산부를 폭행하는 일도 있었다. 인식이 환기된 건 지난 2011년 정도부터였다. 그해 10월10일 임산부의 날에 '만삭 임산부'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고, 관련 청원을 포털사이트에 올리기도 했었다.
폭행·욕설·무시·비아냥…임산부석 수난사(史)
한 임산부가 임산부배려석에 앉아있다./사진=남형도 기자
핑크색 임산부석 도입 4년, 이 자릴 비워둬야 한다는 시민 인식이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게 임산부들 얘기다.
'워킹맘' 김주희씨(33)는 출산 직전까지 일을 하느라, 지하철 5호선을 타고 다녔다. 임신 3개월 때쯤, 몸이 너무 힘들어 퇴근길에 앉으려 했더니 임산부석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다가가 "죄송하지만 비켜달라" 했더니, "에이, 젊은 여자가 참"하고 혀를 차며 자리를 휙 떠나버렸다. 김씨는 "무척 화가 나면서도, 그 자리라도 앉는 내 모습을 보고 서러웠었다"고 회상했다.
임신 6개월째인 임산부 강모씨(31)는 그런 말 조차도 못한다. 임산부란 사실을 알려주는 '핑크색 배지'를 가방 앞에 잘 보이게 달지만, 대부분 돌아오는 건 '무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스마트폰을 하거나, 보고도 모른 척하기 일쑤다. 강씨는 "말 그대로 배려석이라 뭐라 말도 못하고 서 있는데, 몸이 많이 힘들긴 힘들다"며 "양보를 기대하지 않으면 차라리 맘이 편하다"라고 했다.
최근엔 임산부석에서 폭행 사건까지 발생해 화두가 됐다. 지난 21일 청와대 홈페이지 내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임신 13주차 아내가 지하철 5호선에서 폭행당했다"는 남편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이에 따르면 그의 아내는 5월18일 오전 9시30분쯤 출근하는 길에 임산부석에 앉아 있었고, 한 남성에게 "여기 앉지 말라잖아. 야 이 XX야"란 욕설과 함께 폭행을 당했다. 청원자는 "서울교통공사에 대책 마련을 요구해도 알아서 해결하란 답변 뿐"이라며 성토했다.
배부른 티도 안 나는 '초기 임산부'는 더 고통
지하철 5호선 임산부 배려석./사진=서울시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기 이전인 '초기 임산부'들은 더 배려 받기 힘들다. 일반 좌석에서도 외면 당하고, 노약자석에 앉기는 더 눈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임신 2개월째인 '초기 임산부' 박경은씨(29)는 "배가 불룩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좌석 배려를 찾아보기 힘들다"며 "임산부 배지를 안 갖고 다닐 땐, 심지어 임산부석에 앉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임신 초기는 임산부에게 상당히 중요한 시기다. 자궁에 수정란이 자리를 잡으려면 12주가 걸리는데, 임신 후 태아가 안정적으로 착상되려면 산모 안정이 특히 중요하다. 유산의 80%가 임신 초기에 발생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입덧'도 많이 시달리고, 쉴 새 없이 졸음이 쏟아지며,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임산부 혐오 의미 내포한 '낙서'도…서울교통공사 "홍보 신경쓰겠다"
임산부 혐오 의미를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엑스(X)'자 낙서./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지난 2월17일 서울 지하철 4호선 한 전동차 객실 내에선 한 임산부 배려석 사진이 올라왔다. 이 좌석에 부착된 엠블럼 속 임산부와 아이를 낳은 여성 그림엔, 검은색 싸인펜으로 '엑스(X)'자가 그어져 있었다.
실제 임산부석 관련 민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임산부석 관련 민원건수는 총 2만7589건에 달했다. 인구복지협회가 지난해 출산 경험이 있는 임산부 4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 88.5%가 "임산부석을 이용하는데 적잖은 불편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통상 '자리 양보를 안 한다'는 민원이 집중되는 편"이라며 "서울 지하철 하루 이용 인원이 730만명 정도 되다보니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임산부석이 비어 있는 시간이 예전에 비해선 늘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라며 "관련 홍보에도 힘쓰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