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이토록 찬란한 인생

서지연 ize 기자 2019.03.18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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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게’, 이토록 찬란한 인생


JTBC ‘눈이 부시게’에서 김혜자(한지민)는 25살이다. 아니, 정확히는 스스로를 25살이라고 믿고 있는 70대 노인(김혜자)이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홀로 석양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어느 순간 이 사실을 깨닫는다. 초로의 아들(안내상)과 며느리(이정은)가 뛰어오는 현재의 반대편에는 남편을 잃고 어린 아들과 단둘이 남은 과거의 자신이 서있다. 가까스로 눈을 뜬 혜자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시간여행자인 줄 알았던 그가 알츠하이머 환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눈이 부시게’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됐다. 25살 청년의 시점이 70대 노인의 시점으로 바뀌며 마주한 현실은, 혜자는 물론 그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다. 시간이 뒤엉킨다. 소중한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린다. 그러면서 혜자의 시점을 따라가던 많은 사람들은 비로소 공감하게 됐다. 타인의 시점에서는, 특히 젊은 사람의 시점에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던 노인들의 마음을.



맨 처음 ‘눈이 부시게’는 ‘시간을 돌린 대가로 나이를 먹는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판타지처럼 보였다. 시간을 돌리는 것이 마법이고, 나이를 먹는 것이 저주라고 한다면 주인공은 하루빨리 마법을 되찾아 이 저주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혜자의 모습은 판타지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한밤중 가족들 몰래 빠져나와 옥상에 올라간 그는 시간을 돌릴 수 있는 시계를 풀어 던져버리고 목숨을 끊으려 한다. 주변에 폐를 끼치기 싫어 홀로 살아보겠다고 집을 나가기도 하지만 돌아온 후에는 어쩔 수 없이 노인의 삶에 적응해 나간다. 효도관에서 자신이 버린 시계를 차고 있는 할아버지(전무송)를 만난 혜자가 결국 시계를 돌려받는 것을 포기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이 모든 과정은 젊은이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는, 이미 노인이 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다. 다만 스스로를 25살이라고 생각하는 혜자의 시점에서, 노인의 삶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을 뿐더러,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고 싶어 찾아간 성형외과에서는 비웃음거리가 된다. 경보음이 울리는 건물에서 빠져나가려고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만원이 되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혜자를 바라본다. 죽음과 조금 더 가깝다는 이유로, 살아있기에 원하는 것들이 매순간 모욕이 되어 돌아온다.

이런 노인의 삶에서 미래보다는 과거가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혜자는 참담한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잠들었다가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다시 젊어진 그는 마음대로 다리를 움직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준하(남주혁)를 위기에서 지켜줄 수도 있다. 하지만 곧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혜자는 준하를 끌어안으며 “나는 이 기억으로만 사는데 네가 날 잊어버리면 너무 속상할거 같아”라며 울음을 터뜨린다. 늙는다는 것은 점차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고, 결국 죽음 후에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가게 된다. 꿈속에서 혜자가 준하에게 건넨 ‘내일 봐’라는 인사는 그래서 더 애틋하다. 당연한 듯 찾아오는 내일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인생에는 존재한다. 샤넬 할머니(정영숙)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후 무너져 내린 준하에게 혜자는 “허무하지? 온갖 일을 다 겪었을 텐데 결국 사진으로만 남았어. 다 늙은 몸뚱아리, 더 기대할 것도 없는 인생이 뭐가 안쓰럽냐 하겠지만은 난 내가 안쓰러워 미치겠어. 너도 네 인생이 애틋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결국 ‘눈이 부시게’는 삶에 대한 찬사다. 아름답고도 참담했던 수많은 날들을 지나, 인생의 끝자락에서야 온전히 자신을 끌어안게 된다.



혜자는 아들에게 벌어진 끔찍한 사건 이전으로 시간을 돌리는 상상을 수없이 했고, 그 결과 자신이 노인이 된 것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노인에게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자신을 좀처럼 사랑할 수 없었던 준하는 샤넬 할머니의 죽음으로 “그동안 날 괴롭게 한 건 나를 떠난 엄마나 나를 때리던 아빠가 아니라 나였어요. 평생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품지 못해서 괴로웠어요”라고 고백한다. 어느 날 혜자에게 일어난 마법 같은 사건은, 실은 모두의 삶 속에서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똑같은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과거의 실수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하고, 초라한 현재와 바라는 미래를 비교해 상처 입기도 하면서.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 시간을 흘려보낸다. 오로라를 보고 싶어 했던 혜자는 마침내 오로라 같은 풍경 속에서 진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다. 특별하지 않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오로라가 눈물 나게 사랑스러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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