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게 살기'를 거부해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9.02.23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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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되려 억눌렀던 마음들 '해방'…싫은 소리하고 화내고 거절해도 그냥 '나'답게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착하게 살기'를 거부해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새해 첫날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 도로에, 차를 잠깐 세워뒀다. 비상등을 켜놓고. 아내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잠시 뒤 초보운전 차량 한 대가, 내 차를 피해 왼쪽으로 지나갔다. 밖으로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마주오는 차량과 맞닥뜨렸다.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 지나가게 하면 되는데, 당황했는지 후진을 했다. 근데 또 다른 차가 나와 앞뒤로 발이 묶였다. 그 때, 별안간 초보운전 차량의 조수석 창문이 내려왔다. 그리고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도끼 눈을 뜨고,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아니, 아저씨. 왜 보고만 있어요. 혼잡하면 보고만 있지 말고 차를 빨리 치워야 될 것 아니에요!"

순간 몹시 불쾌해졌다. 초면에 굉장히 예의 없이, 화내며 고래고래 소리부터 지른다는 게. 엄밀히 따지면, 교통을 혼잡하게 만든 건 초보운전 차량이었다. 굳이 후진할 필요가 없었다. 또 그 모든 게 1분 남짓할, 잠깐 동안 일어났고, 기자는 밖에 나와 있었다. 그래서 차를 비킬 새도 없었다. 잘잘못은 둘째쳐도, 동네 주민끼리 고함부터 지르는 게 무슨 일인가. 더구나 새해 시작부터. 그래서 똑같이 화내며 이렇게 응수했다.



"아, 잠깐 세워둔 거에요."(기자)

"뭐요?"(남성)

"잠깐 세워둔 거라구요!"(기자)


"잠깐이고 뭐고 비키라구요. 아니 아저씨, 그리고 이거 이렇게 세우는 거 솔직히 불법주차 아니에요."(남성)

남성은 더욱더 고성을 질렀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무슨 불법주차인가. 도로교통법 적용도 안 받는데. 다들 불가피하게 잠깐씩 세우곤 한다. 기자도 3분 정도 세웠었다. 그렇게 대꾸하려다 말고, 그냥 말 없이 그를 응시했다. 무언(無言)의 불쾌감 표현이었다. 그는 분을 못 이겼는지, "아이 X발"하면서 운전석에 앉은 여성과 자리를 바꿨다. 차량 문이 부서져라 쾅 닫고는, 이내 사라졌다.

불쾌했지만, 속은 좀 시원했다. 화난 마음을 표현했기 때문에. 평소 같으면 아마 "죄송하다" 한 뒤, 차를 바로 빼줬을 터였다. 그리고 그걸 곱씹으며, 화를 삭였을 거였다. '왜 아까 가만히 있었지. 말을 했어야 했는데' 하면서. 근데 그렇게 안했다. 충분히 표현하진 못했어도, 불쾌한 맘을 보여줬다. 적어도 그렇게, 아무렇게나 화내면 안된단 걸 알려줬다.

/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이른바 '착한 사람 깨기'였다.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단 생각에 갇혀 있었다. 맘 속 감정과 실제 표현이 따로 놀았다. 그럴 때면 맘이 뒤틀렸다. 하고 싶은 말도, 하기 전 여러 번 생각했다. 그래서 침묵할 때가 많았다. 사람을 대할 땐, 웬만하면 웃었다. 기분 나빠도 티를 잘 안 냈다. 그리고 누군가 부탁하면 거절도 잘 못했다. 자잘한 감정이 쌓이니 화(火)가 됐다. 일순간 이런 내가 답답해졌다. 할 말 있을 땐 제대로 하고, 화날 땐 화내고, 거절할 땐 거절하고, 싫은 소리도 하고, 그러고 싶었다. 속 시원히 할 말 다하는 사람을 볼 때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결심(決心)하게 된 계기는 결혼이었다. 그 전엔 힘들어도 혼자 감내하면 됐다. 근데 결혼하니 그게 아녔다. 모든 게 함께였다. 거절 못해 끌려다니고, 표현 못해 속상해하고, 싫은 소리 못해 답답해하면, 아내가 옆에서 더 힘들어했다. 또 불합리한 상황에선 나서서 따져야 했다. 누군가에겐 '착한 사람'인게, 아내에겐 '나쁜 남편'일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회사서 팀장을 맡게된 뒤에도 그랬다. 팀원들에게 필요한 말들을 해야했다. 또 팀을 대신해 방어를 해야할 때도 있었다. 부장과 팀원 사이에서, 조율도 잘해야 했다.

그래서 작심했다, 이젠 좀 바뀌자고. 새해부터 '착한 사람'을 깨보기로 맘 먹었다. 그리고 2주 동안(2월16일부터 2월22일)은 작정하고 해보기로 했다(다들 긴장하라, 두둥).



착해야 된단 '마음'…왜 그랬을까


'착한 사람' 역할을 하루 종일 충실히 수행하고 나면, 이 지경이 된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뻗은 기자의 모습. 얄미운 복부는 독자의 안구 보호를 위해 블러 처리했다. /사진=남형도 기자 아내'착한 사람' 역할을 하루 종일 충실히 수행하고 나면, 이 지경이 된다. 퇴근 후 집에 와서 뻗은 기자의 모습. 얄미운 복부는 독자의 안구 보호를 위해 블러 처리했다. /사진=남형도 기자 아내
거꾸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얽매여 있는 지를.

"좋은 사람이네"란 얘기를 듣는 게 좋았다. 어렸을 땐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씩씩하게 곧잘 했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도. "그 집 아들 참 착하다"란 말이, 엄마를 통해 들려왔다. 기분이 썩 좋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땐, 백모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형도는 착해서, 상담할 때 당부할 말이 없겠다"고. 대학교 조모임 땐, 후배들에게 "좋은 조장을 만나 조모임 오는 게 즐겁다"는 얘길 들었다. 기자가 된 뒤엔 기사에 달리는 댓글에 신경썼다. "좋은 기사네요", "참기자네요" 같은 그런 반응 말이다.

그런 수식어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내 모습이 됐다. 벗어나면 실망할까봐, 그 안에 얽매여 있었다. 수능을 다시 봤을 때, 학원에 동생(별로 안 친한) 하나가 있었다. 장난이랍시고 던진 말들이 선을 자주 넘었다. 그런데도, 그 말에 같이 웃고 있었다. 사실 화가 났는데도. 대학교 조모임서 조장을 할 땐, 무임승차 조원이 안한 몫을, 그냥 내가 더 했다. "과제 똑바로 해"란 말은, 늘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적(敵)을 만들기도 싫었던 것 같다. 누군가 날 싫어할까봐. 특히 사회 생활에서 '생존'을 위해 그랬다. 예전 회사에서 모 상사는, 대꾸하면 "어딜 감히"란 반응이었다. 그게 정당한 주장이었어도. 그 길로 찍혀서, 고단했었다. 그리고 착한 부하직원이 됐다. 그게 직장 생활에 편했다. 그런 트라우마들이 남아, 내 편을 많이 만들어야 한단 생각이 됐다. 그래서 갈등도 많이 불편했다. 그게 인간관계서 자연스런 것인데도.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것)'가 잘되는 성격도 문제. 상대방이 느낄 감정이 잘 느껴졌다. 그래서 화낼 상황에서도, "혹시 상처 받으면 어쩌지" 이 따위 생각들을 했다(진짜 답답). 배려가 몸에 뱄다. 다른 이에겐 장점이지만, 내겐 단점이었다. 길을 걷다 부딪치면, 내 잘못이 아닐 때도 "죄송합니다"가 먼저 나왔다. 그 때, 상대방이 쓱 가버릴 때도 많았다. 얼굴 보면 인사부터 나왔다, 반응이 시큰둥해도. 마주 오는 사람에겐 늘 먼저 비켜줬다.

마지막으론, '자존감'에 대한 부분. 동조하거나, 침묵하면 착한 줄 알지만, 그게 아녔다. "내 생각이 맞나?"하고 두 번, 세 번 곱씹는 습관이 있었다. 예컨대, "여행은 유럽이 좋지"하는 사람에겐 "그렇지"라 하고, "휴양지가 좋아"라고 하면 "그것도 맞지" 이랬다. "난 유럽 자유여행이 좋아"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들릴까 생각하느라고.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컸다면 안 그랬을 것이다. 이는 추진력이 떨어지게 하는 원인도 됐다.



무례한 이들에게…"사과하라"고 해봤다
불금에 찾은 곱창집 내부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일행이 온다며 자릴 맡은 이들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들 일행은 1시간이 넘도록 다 오지 않았다. 바깥엔 손님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불금에 찾은 곱창집 내부가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일행이 온다며 자릴 맡은 이들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들 일행은 1시간이 넘도록 다 오지 않았다. 바깥엔 손님들이 추위에 떨고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2월15일, '불금' 저녁이었다. 곱창에 환장하는지라, 서울시내 한 맛집을 찾았다. 마침 쉬는 날이라, 오후 6시에 맞춰 갔다. 근데 좁다란 가게 내부는, 벌써 꽉 차 있었다. 별 수 없이, 바깥서 줄을 섰다. 손님들이 연신 모여들어, 금세 길어졌다.

그런데 내부 손님 중 한 여성이 눈에 띄었다. 자리 여덟개를 혼자 맡은 뒤,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일행은 아무도 없다가, 오후 6시30분이 돼서야 한 명이 왔다. 오후 7시10분이 다 돼도록, 자리 네 개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15명 남짓한 손님들은 추운 바깥에서, 미세먼지를 흡입하며 기다렸다. 내 뒤에 서 있던 한 아주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저건 좀 아니다. 그렇죠?"하며 동조를 구했다.

무언가 뜨거운 게 꿈틀거렸다. 저건 예의가 없다고 느꼈다. 1시간 동안 비워둔다는 게. 그 정도면 빨리 먹는 이라면 다 먹고 나올 시간이었다. 맘 속에서, '저건 잘못됐다'와 '그냥 참견말자'란 두 생각이 서로 싸웠다. 그러다 자주 가는 닭볶음탕 맛집 생각이 났다. 그 가게는 "일행이 다 와야 들어갈 수 있다"는 방침이 있었다.

그래서 맘 먹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에게 가서 정중히 따졌다. "일행도 다 안 왔는데,저렇게 많은 자릴 맡아두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다들 추운데 밖에서 기다리는데요." 그러자 점원은 "그래도 음식은 주문해뒀다"며 얼버무렸다. 그가 무슨 잘못이랴. 그러고 말았다. 무례한 이들에게 직접 따지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진 못했다. 아직 연습이 덜 된듯 했다.

주말, 아내와 스O벅스를 갔다. 자리에 앉아 얘기하고 있었다. 그 때 옆에 있던 한 여성이, 아이스 음료를 엎질렀다. 액체와 얼음이 아내 쪽으로 튀어 옷에 묻었다. 그런데 정작 그 여성은 "어떡하냐"며 보고만 있었다.

당황스럽고 불쾌했다. 본인이 저질러 놓고 어떡하냐 묻다니. 아내는 싫은 소릴 못하는 지라 그냥 "괜찮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표정을 굳히고, 여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음료를 쏟았으면, 죄송하다고 먼저 사과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그랬더니 그제서야 그는 "죄송하다"고 했다.



무례한 이들에게…'인사'를 안해봤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그렇지만 자잘하게 맘 상한 일도 있었다. '인사' 였다. 매일 같이 마주치는 누군가가 있었다. A라고 해두자(누군진 비밀). 평소 마주치면 인사를 잘하는 터라,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하고 인사하곤 했다. 그러면 보통 친절한 이는 "네, 안녕하세요"하거나 "응, 안녕"하고 같이 인사한다. 좀 무뚝뚝한 이는 "네" 만 하거나, "응"만 한다. 그런데 A는 내 얼굴을 보고, 인사를 받고도, 아무 대답도 안했다. 첨엔 잘 못 들었나 하고 넘겼는데, 그 다음에도, 그리고 그 다음에도 묵묵부답. 인사가 맛있는지, 늘 그렇게 잡쉈다.

이게 한 네댓번쯤 반복되니, 묘하게 빈정 상했다. 그래서 소심(小心)한 복수를 다짐했다. '인사 안하기'였다. 계획은 이랬다. 일단 평소처럼 얼굴을 본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다. 그럼에도 자연스레 지나친다. 지나간 뒤 씨익 웃는다. 이런 생각을 하며 때가 오길 기다렸다. '아, 빨리 인사 안해보고 싶다', '빨리 마주쳤으면 좋겠다' 하면서(약간 이상함).

그리고 마침내 그 날이 왔다. 오후 3시쯤이었나. A와 우연히 맞닥뜨렸다. 얼굴을 보고, 눈이 마주쳤다. 순간, 대뇌에 나도 모르게 신호가 갔다. '인사해'라는 명령이. 그래서, 무조건 반사처럼, 약 5도 정도 고개를 숙일 뻔 했다. 그렇지만 다행히 멈췄다. 상상을 통해, 훈련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쌩' 하고 지나갔다. 인사를 안한 것이다. 뭔가 속이 시원했다. 짜릿한 기분이었다.

'착하게 살기'를 거부해봤다[남기자의 체헐리즘]
'악성 댓글'에도 대응해봤다. 기자라면 어쩔 수 없는, 숙명(宿命) 같은 거다. 대부분 '다른 의견이려니' 하고 넘겨왔다. 근데 때론 인신공격이나, 말도 안되는 주장 같은, 참기 힘든 것들도 있었다.

지난 10일에도 그런 댓글이 달렸다. 내 '기자페이지'엔 기자가 된 계기를 써놓은 게 있다. '쓰레기를 치우는 아주머니께서 쓰레기통에 앉아 쉬시는 걸 보고 기자가 됐습니다'라고. 대학생 때 봤던 광경이다. 우리가 머무는 곳을 가장 깨끗하게 만들어주시는 분이, 정작 본인은 가장 더러운 곳에 앉아 숨을 돌리는 걸 봤었다. 부조리하다 여겼고, 이를 크게 떠들어 알리고 싶었다. 그게 기자가 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됐다. 그래서 초심(初心)을 잃지 말자며 써놨었다.

근데 그걸 가지고 누군가 댓글로 비꼬았다. 그 문장을 그대로 읊더니, "기자 된 계기가 왜 매번 바뀌는 기분이죠? 기자는 진실이 생명 아닌가요?ㅋㅋ"하고 달았다. 허무맹랑한 얘기였다. 기사에 대한 거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근데 기자가 된 계기를 갖고 터무니 없는 공격을 하니, 넘어갈 수 없었다.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답글을 달았다. 최대한 정중하게. "기자가 된 계기가 바뀐 적 없는데, 뭘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주장을 하시려면 그에 맞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셨으면 합니다"라고.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악성댓글을 단 이도 다시 답글을 남겼다. 요약하면 이렇다. 전에 기사에선 이런 계기 글을 못 봤다, 기자가 된 계기랑 연관되는 기사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분들 처우개선을 위한 글을 더 많이 써달라고. 여기엔 답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불쾌한 내 맘을 존중해서.

③싫은 소리를 해봤다…필요한 얘기라서
지난해 처음 팀장이 됐다. '성장통'이 있었다. 그 전엔, 혼자 열심히 잘하면 됐는데, 이젠 그게 아녔다. 팀원들을 잘 살펴서 이끌어야 했다. 그리고 잘할 수 있게, 이끌어줘야 했다. 그런데 항상 숙제처럼 안되는 게 있었다. '싫은 소리', '쓴 소리'였다.

팀원이었을 때 바라던 팀장 모습이 있었다. 솔선수범해 열심히 하면서,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 잘한 것에 대해 충분히 칭찬해주는 것.

여기까진 어찌저찌 됐는데, 정작 중요한 게 따로 있었다. 팀원들에게 싫은 소릴 하는 거였다. 싫은 소리란 게, 꼭 혼내고 그런 것만이 아니라, 필요한 피드백을 주는 것까지 포함됐다. 예컨대, 기사 발제가 얘기가 안될 때, 기사를 다 쓴 뒤 보완할 게 필요할 때, 오타나 맞춤법을 틀렸을 때 등. 따끔하게 얘기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근데 이게 지독히 잘 안 됐었다. 열심히 취재하고 고민해서 쓴 기사인 걸 알아서, 그냥 넘어가거나 알아서 고치곤 했다. 후배들 얼굴을 보면, 맘이 약해졌다.

그래도 앞날을 위해 단단해졌으면 했다. 선배가 쓴 소릴 견디고 그랬듯이. 그래서 용기내서 하나씩 얘기해줬다. 기사 제목에 오타를 쓴 후배에겐 "제목은 정말 중요하니, 다 쓰고 꼭 봐야 한다"고 일렀다. 현장 기사를, 사정상 하루 뒤 마감한 후배에겐 "어제 발생한 기사라 시의성이 떨어진다. 이럴 땐 새로운 시각으로 쓰든, 분석이 들어가야 기사가 살 수 있다"고 했다. "감사하다"는 답이 왔다. '기(氣)를 죽이는 건 아닐까' 괜히 맘이 쓰였다. 이미 잘하고 있는데.

인턴 기자 한 명이 출근 첫 날부터 꾸벅꾸벅 조는 걸 봤을 땐, 이름을 부르며 "졸고 있냐"고 따끔히 혼냈다. 옆에 있던 부장이 "와, 깜짝이야"하고 놀랐다. 평소 큰 소릴 낸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런듯 했다. "나가서 잠 깨고 오라"고 했다. 사회 생활이 첨이라, 긴장이 필요할 거라 여겼다. 맘이 안 좋았지만, 쓰디쓴 약(藥)이 됐음 했다. 방치하는 게 애정이 아니라 생각했다. 중학교 때 자는 애들마다 등 두드리며 깨우던, 국어 선생님 생각이 났다. 그 땐 그렇게 싫었는데, 그게 다 정(情)이었다.

기사를 재촉하는 상사에게도, 할 말을 하려 했다. 부지런히 쓰는 후배들 상황을 충분히 모를 수 있기에. 아직 쓰기 힘든 것, 쓸 만한 게 아닌 것, 손이 모자라 당장 못 쓰는 것 등은 대신 나서서 얘기하려 했다. 물론 충분치는 않았다. 후배들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예의 없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 때문에, 맘 처럼 잘 안 됐다.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졌단 생각에 위안을 했다.



④그리고, '거절 잘하기'
'거절당하기 50번' 체헐리즘을 했을 때, 독자 중 누군가 그랬었다. '거절하기' 체험도 해달라고. 그게 더 어려울 거라고. 그 때 몹시 뜨끔했었다. 나도 거절을 잘 못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부탁을 들어주다, 내 앞가림을 못한 적도 있었다. 어떻게든 해내는 게 좋은 거란 생각을 품고 있었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저자인 양창순 정신과 전문의는 "나를 미루어 남을 생각해봐도 내가 부탁을 거절하면 상대방이 상처 입을 게 뻔한데, 쉽게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미적대면서 답변을 늦추기도 한다"고 했다. 내 얘기였다. 그럴 경우, 상대방은 더 기대를 키웠다가 더 실망한단다. 가장 안 좋은 거절 방법이라고. "간결하고 명료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거절해야 할 상황이 참 많았다. 동기 결혼식 때 주말 근무가 겹쳤다. 그럼 "못 간다"고 하면 되는데, 이럴 때도 말이 잘 안 나왔다. 전화로 하기 힘들어, 메신저로 "꼭 가고 싶었는데 미안하다. 주말 근무 때문에 못 가게 됐다"고 했다. 축의금은 부탁해서 보냈다. "이해한다. 괜찮다"는 답이 왔다. 바로 얘기하고 나니, 오히려 맘이 후련했다.

한 방송사 프로그램서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도 고민이 컸다. 과분했고, 감사했지만, 일정이 버겁단 생각이 들었다. 팀장 업무도 해야했고, 뭣보다 체헐리즘 기사에 충실해야 했다. 저녁·밤 시간을 꾸준히 뺏기는 것도 걱정이었다.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했기에(점수따기v). 고민 끝에, 이런 맘을 충분히 담아, 문자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아쉽다. 다음에 더 좋은 인연으로 뵙고 싶다"는 답장이 왔다. 전화로는 못했지만, 하루 만에 의사를 밝혔다. 늦어지고, 망설이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모 제품을, 체헐리즘을 통해 홍보하면 어떻겠느냐는 요청도 받았다. 유명한 제품이었다. 담당자는 "저널리즘이 강한, 기획 기사라 의사(意思)를 먼저 여쭤보고 싶다"고 했다. 고민해보고 답해드리겠다고 했다. 이 제품을 혹시 협찬 받을 수 있다면, 사회 곳곳서 고생하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체험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물론 그쪽에서 원치 않을 수 있음). 그래서 고민만 하다, 일주일이 갔다. 송구하게도, 아직 거절을 못했다. 기사를 마감한 뒤 연락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피로한 상황을 끊어버렸다. 스팸 전화와 문자와 메일을, 일일이 차단하고 수신 거부를 해봤다. 전화가 왔을 땐 "고생하시는 것 알고, 죄송하지만, 이런 전화 더 안해주셨으면 좋겠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어떤 이는 "그렇게 정중히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훈훈하게 통화가 마무리 됐다. 물론 여전히 다른 종류의 스팸 전화는 계속 오는 건, 함정.



'개운함'과 '불편함' 사이에서
'착한 사람'은 이제 그만 내려놓고, 나답게 살기. 그렇게 생각하니 후련했다. 어떤 내 모습이든, 그냥 내 모습 그대로.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이 영화 장면이 생각났다./사진=해리포터 영화 화면 캡쳐'착한 사람'은 이제 그만 내려놓고, 나답게 살기. 그렇게 생각하니 후련했다. 어떤 내 모습이든, 그냥 내 모습 그대로.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이 영화 장면이 생각났다./사진=해리포터 영화 화면 캡쳐
이렇게 체험은 끝났다. 아니, 아직도 진행 중이다. 착하고 싶은 내 모습과, 표현하고픈 내가 여전히 매일 싸운다. 오래 지녀왔던 습관들이, 하루 아침에 바뀌진 않았다. 그런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나아졌을 뿐이다. 그런 내 맘을 알게 됐고, 왜 그런지 객관적으로 보게 됐고, 이를 끄집어내주려 애쓸 뿐이다. 그래도 그게 시작이었다. 적어도 꾹꾹 눌러서 살진 않게 됐다.

이를 잘 들여다 본 뒤,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①무례한 이들에겐, 불편한 감정을 표현한다(좀 무례해도 됨) ②좋은 사람들에겐 더 좋게 대한다 ③확실히 안되는 상황은 빠르게, 고민될 땐 거절 기한을 정해서 지킨다 ④거절할 땐 정중하고 간결하게 ⑤길게 봐서 상대에게, 혹은 관계에 필요할 땐 쓴 소리를 한다 ⑥그 과정에서 맘 처럼 안되는 것에 자책하거나 스트레스 받지 말자.

그럼에도 두 가지 기분이 함께 떠오르곤 했다. 개운했다가, 불편했다가. 내 맘을 표현했을 땐 참 시원했다. 열기로 끙끙 앓던 마음에, 냉수를 한 바가지 끼얹어준 것처럼. 그러다가도 맘 한 켠이 쭈그러들었다. 내 말에 상처 받았을까, 스트레스 되진 않을까, 거절해서 혹 싫어할까, 실망했을까, 관계가 깨지려나, 이런 고민들. 그럴 때면, 다시 '좋은 나'로 되돌아가고픈 맘이 고갤 들었다. '그렇게 사는 게 편했는데'하고.

그럴 때면, 마음을 다시 먹었다. 누군가 그랬었다. 음식을 먹으면 몸이 건강해지듯, 마음도 자꾸 다짐해줘야 단단해지는 거라고. 그래서 '마음 먹는다'란 표현을 쓰는 거라고. 이게 맞는 거라고, 반복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원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상상했다. 힘이 됐던 건, 나와 같이 '착한 사람'을 못 깨는 아내와 대화한 일이다. 퇴근 후 저녁 때 아내는 그런 얘길 했다. "오늘 그만두는 직원이 있어 꽃을 샀는데, 싱싱하지가 않았다"고. "그런데, 꽃 파는 아주머니가 너무 열심히 만들고 있어서 싫은 소릴 못했다"고. 그 맘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서로를 격려했다.

'착한 사람 깨기'와 관련된 책들. 결국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사진=남형도 기자'착한 사람 깨기'와 관련된 책들. 결국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사진=남형도 기자
또 다른 힘이 됐던 건 책이었다. 요즘 서점가 화두도 '자존감'이라, 관련 서적이 많았다. 스스로 생각하면 "그래도 되나?" 이랬지만, 누군가(전문가 포함) 그게 맞다고 해주니, 좀 더 믿게 됐다. 스스로를 일으키는데, 도움 됐던, 좋은 문장들을 소개한다. 여러 책을 뒤적여 찾은 구절들이다.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보통 인정 욕구가 강렬하다.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무소유'를 쓴 법정 스님도 인정 욕구 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 뒤집어써야지' 생각해선 안된다.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선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유은정-혼자 잘해주고 상처 받지 마라 中>

"갈등하던 나는 어느 순간 그 기대치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자 놀랍도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들의 평가에도 예전처럼 민감해지지 않았다. 인간관계에서도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전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일종의 자유로움에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양창순-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中>

"좋은 사람이란 소리도 듣고 싶고, 거절도 잘 하고 싶다면 그건 욕심일 뿐이다. 둘 중 하나는 어느 정도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상대 부탁을 거절할 자유가 있듯, 거절할 상대도 내게 실망할 자유가 있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하면, 그 모든 사람에게 휘둘리게 된다." <정문정-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대처하는 법>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도 우리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사랑받고 싶지만 거절을 당할 수 밖에 없고, 칭찬 받고 싶지만 실망을 줄 수밖에 없다. 우리 마음에 아름다움만 존재할 순 없다. 누구나 내면에 문제가 있다. 남들이 알면 놀랄 욕망도 있고, 욕심도, 질투도, 시기도 숨어 있다. 당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시험을 못 봤다고 해서 나쁜 학생이 아닌 것처럼."<윤홍균- 자존감 수업>

"상냥한 사람은 미움 받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상냥하게 행동한다. 상냥한 사람이 고민을 많이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인다. 타인의 평가에 따라 자신을 평가한다. 남의 시선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자신을 희생한다. 무뚝뚝해지는 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이케다 준- 무뚝뚝해도 괜찮습니다>



함께 반란을 꾀했던, '착한 사람들'
독자들에게, '착한 사람 깨기' 체험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었다./사진=남형도 기자독자들에게, '착한 사람 깨기' 체험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지난 16일, 기사 댓글로, 독자들에게 '착한 사람 깨기'를 함께 하자고 했었다. 3명이 신청했는데, 애석하게도 1명만 "체험을 실제 했다"며 메일이 왔다. 다른 분들도 맘 처럼 잘 안 됐을 거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들을 응원한다. 잘될 거라고. 괜찮다고.

전예슬씨(22)는 평소 주위서 잘 웃는단 얘길 많이 들었다. 착하다는 얘기도. 남들을 돕는 걸 진심으로 기뻐하는 이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사정상, 혹은 하기 싫어서 거절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거절을 못했다. "나쁜 사람으로 남는 게 싫어서"라고 했다.

체험 기간(2주) 동안 전씨 목표는 베프(가장 친한 친구)인 N씨에게, 예전에 섭섭했었던 맘을 전하는 거였다. 지난해 전씨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N씨가 결국 오지 않았단다. 그게 "너무 서운했다"고. N씨의 사정도 알고, 거리가 멀어 못 올 거라고, 머리론 이해했지만, 맘은 안 그랬단다.

이걸 얘기하려 했는데, N씨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고 했다. "가족 일로 너무 힘들다"는 N씨 하소연을 듣고 있자니, 몇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서 전씨는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얘기하자"고 했는데, 체험 기간 동안 기회가 안 왔다고 했다. 결국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고(N씨가 이걸 좀 봤으면).

전씨는 "어느샌가 부탁을 들어주고 싫은 소릴 안하는 게, 내게도 좋은 거라 생각했다"고 털어 놓았다. 웃으면서 들어주면 다른 사람도 기뻐하고, 그래서 자신도 기뻤다고. 근데 가끔은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몇몇 사람들처럼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하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그러면서 "당분간 어쩔 수 없이, 착한 사람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서 만난 엽서 속 문구가 좋아 찍었다./사진=남형도 기자서울 종로구 익선동에서 만난 엽서 속 문구가 좋아 찍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에필로그(epilogue). 맘 속에 박혀 있던 말이 생각났다, 체험이 끝나갈 무렵. 까먹었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못 뽑은 '가시'처럼 남아 있었나보다.

회사 상사였는데, 갑자기 그런 얘길 했었다. "형도는 물 같다"고. 무슨 얘긴가 싶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느냐" 물었더니, "무색 무취라서 그렇다. 아무 색깔이 없어서"란 식으로 답했다. 그날 하루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게 '나쁜 사람'이라 욕하는 것보다, 더 심한 얘기란 걸 깨달았다. 더 화가 났던 건, 그 말을 웃어 넘겼던 내 모습이었다. 누굴 원망하겠는가. 어쩌면 그렇게 만든 건 내 자신인데.

그래도 뒤늦게나마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싶다. 이렇게 말이다.

"그 때 당신의 그 말은 몹시 불쾌했습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미덕(美德)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목소릴 내기보단 따랐고, 존중했습니다. 내 자신보다, 누군가를 더 생각한 건 맞습니다. 근데 무색 무취라뇨.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무례한 겁니다, 함부로 판단하는 건. 막 대하지 마세요. 당신이 상대방이 편하다면, 그 사람은 어쩌면 배려하고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이제 속이 좀 시원하네요. 그 때 말 못했던 저를, 이렇게 뒤늦게나마 위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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