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참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다 참았구나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9.02.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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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최정란 시인 ‘장미키스’

[시인의 집] 참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다 참았구나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정란(1961~ )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장미키스’는 가까운 사람들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위태위태했던 관계는 말(言)로 인해 더욱 악화돼 인연을 끊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감정이 최악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감정이 누그러질 때까지 “공손히/ 그늘을 받쳐 들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견디는 것이다. 지지고 볶고, 말싸움을 하고,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의 바탕에는 결국 “충분히 사랑”(이하 ‘시인의 말’)하고 싶은 욕망이 깔려있다. 혼자서는 풀지 못하는, “지금도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시인은 “어눌한 말을 대신할 시를”(1995년, 그 후) 쓴다.

얇은 베니어판을 사이에 둔 두 개의 작은 방처럼
분노와 슬픔은 이웃해 있다
분노와 슬픔을 켜는 스위치는 한 개



두 방 사이 벽에 뚫은 작은 구멍을 통과하는
형광등처럼
슬픔이 켜지면 분노도 깨어나고
분노의 스위치를 누르면 슬픔의 식구들 눈을 뜬다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와 아우와
칼을 들고 싸운다



내가 먼저 싸움을 걸고 아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맞받아
전화기로 우리는
한껏 날카롭게 벼린 칼로 서로를 찌른다
서로의 급소와 약점을 알고 있는 우리는
치명상을 입는다

피투성이가 된 우리는
왜 싸웠는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유도 모르고
한동안 남처럼 소원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인데
세상에 나를 보낸 육친이 더 이상 없는 것뿐인데
형제자매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우리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동생 잘 돌보렴, 누나와 의논하렴,
신신당부하셨는데

슬픈가 부모 잃은 고아답게 깊이 슬픈가
많이 아주 많이, 심장이 터지도록 슬픈가
가장 만만한 사이끼리
말로라도 피를 보지 않을 수 없이 슬픈가

- ‘슬퍼하는 이들의 수고를 짐작한다’ 전문


위의 시 ‘슬퍼하는 이들의 수고를 짐작한다’는 관계가 틀어진 ‘아우와 나’를 통해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려 한다. “형제자매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 가장 가까운 아우와의 관계가 틀어진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면서 그 상황을 슬퍼한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이전에 이미 금이 가 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사이는 “얇은 베니어판” 같고, 끊을 수 없는 관계는 “두 방 사이의 벽”을 통과해 양쪽 방을 다 같이 밝혀주는 형광등 같다. 한쪽의 스위치를 끄면 다 캄캄해진다. 혈육이기에 누군가 한쪽이 분노하면 식구들 모두가 슬프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례를 치르자마자 전화로 “치명상을 입”힐 만큼 서로 싸운다. 말로 “피투성이가 된 우리는” “한동안 남처럼 소원하”게 지낸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다. 그때 비로소 “동생 잘 돌보”라는 아버지 생전의 신신당부가 떠오른다.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한 자책과 죄책감으로 “심장이 터지도록” 슬픔이 밀려온다. 반복해 언급하고 있는 “슬픈가”는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이를 말해준다.

이 고집 센 흰 천도 한 풀 기가 꺾였어요
풀 먹여 다림질하고 각 잡은 네 귀,
빳빳했고요
모서리에 수놓은 앙큼한 미모사 꽃,
도도했지요

일학년 코흘리개의 가슴에도
숙녀의 핸드백에도 신사의 호주머니에도
없어서는 안 되던 독보적인 그 인기,
예전만 못하다 해도
꼭 움켜쥐고 있으면 의지가 돼요

고삐를 쥐듯 놓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아는 고집 센 염소처럼
어둠이 오기 전에
무사히 집으로 데려다 줄 것 같아요.

잠깐만 참으면 될 거야

빈손으로 다 받아낼 수 없는, 그 젖은 순간
빈손으로 다 받아낼 수 없는, 그 메마른 순간
흘러넘쳐 터지거나,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기 직전
속으로 숫자를 세며, 움켜쥐지요

아무 일도 아닌 사소한 일이 될 거야

영원처럼 길게 여겨지는 그 잠깐이 지나
네 귀퉁이 각이 무너지고
미모사 꽃잎이 으깨지고

잘 참았다 잘 숨겼다, 구겨진 만큼
한숨 쉬며 안도하지만
참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다 참았구나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다 숨겼구나
다시 한숨 쉬지요

그 한숨까지 다 받아내자면
생의 거친 들판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시간의 흰 천은 얼마나 더 구겨져야 할까요

밖으로 나오는 것들은 받아냈지만
안으로 들어간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움켜쥘 것 하나 없이 안으로 들어간 것들은
또 얼마나 깊은 곳에서
무엇을 적시며 흐르고 있을까요
무엇을 태우며 재가 되고 있을까요

바람이 건네주는 손수건에 기대는 날이 있어요

- ‘손수건’ 전문


시 ‘손수건’은 손수건이라는 사물을 통해 삶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고집 센 흰 천”은 본성을, 빳빳했고 도도했다는 것은 성격을, “독보적인 그 인기”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를 말해준다. 하지만 손수건의 본래 쓰임새는 땀이나 눈물을 닦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로서의 상처와 슬픔이 스며있다. 재미있는 것은 시적 화자가 손수건에 더 의지하기도 하고, 나와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나는 손수건이 아니면서 손수건인 중첩화자이다.

시는 4행부터 참고 견디는 눈물의 시간들로 채워진다. 결코 “빈손으로 다 받아낼 수 없는” 젖고 메마르고 “흘러넘쳐 터지거나,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기 직전”의 순간을 손수건과 함께 견딘다.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힘든 일도 사소하게, 영원할 것 같던 잠깐처럼 느껴지는 것은 “참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다 참”으면서 인고의 시간을 견뎠기 때문이다. “이렇게 쉽게 심장이 부서질 줄”(‘백설기’) 모르면서 “생의 거친 들판을” 무사히 건넜기 때문이다.

문제는 밖으로 나온 것들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간 것들”이다. “움켜쥘 것 하나 없이 안으로 들어간 것들”을 위한 ‘내면의 손수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 자신은 “길이가 짧아지면 불 속으로 몸을 던”(이하 ‘부지깽이’)지는 부지깽이처럼 스스로 재가 된다. “인생의 질량만큼 불살랐으니 후회”는 없다고 자위하지만 부지깽이가 타버려도 아궁이의 불이 꺼지는 것은 아니다. 내면의 손수건을 흠뻑 적시거나 아궁이의 불이 다 꺼져 재가 될 때까지 심한 마음고생을 해야 한다.

오랜 친구 하나가 찾아와 언니라 부른다 뜬금없이
도대체 그에게 나는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몇 년 만에 만나는 그는 어깨를 들썩이며 조금 울었고
나는 어깨에 손을 얹고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린다
어느 날 문득 삶이 찾아와 나에게 언니라고 부른다
도대체 삶에게 나는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삶도 울먹거리는 듯했으나 삶의 어깨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나는 다만 허공에 잠시 손을 얹어둔다
나도 삶의 문을 똑똑 두드리며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문 열어봐 언니, 꽃 피는 언니 가시 같은
언니 실낱같은 언니 한숨 같은 언니 몹쓸 언니
왜 그랬어 왜 그랬어 나한테 왜 그랬어 그때쯤이면
봄날의 무릎 위에도 손 하나 얹히겠지 생활의 때가
앉기 시작한 손, 어쩌면 그 손은 아직 삶의 숯불에
데어본 적 없어, 풀어야 할 매듭을 번번이 놓치고도
서툴게 무언가 더듬더듬 쓰다듬으려 들기도 할까

- ‘언니’ 전문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결국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나날이 묽어지는 “시간이 섞인 피”(‘시간은 피를 희석시킨다’)와 까맣게 속이 타 “깊이/ 검은 맛”(‘내가 남긴 잔을 당신이 비울 때’)을 내는 시간과 “삼킨 말 한마디에/ 심사가 뒤틀린”(‘꽁치’) 것들의 삭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한 ‘소’가 “가구로 변신”(‘책상’)할 수 있는 오랜 세월과 “언제 거기 놓인 줄도 모르고 놓여 있”(‘쇼 윈도우’)을 만큼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멀어졌던 사랑이 다시 찾아오고, 화해의 기회가 찾아온다.

시 ‘언니’처럼 “몇 년 만에” 찾아와 “언니” 하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오랜 친구”는 진짜 오랜 친구이거나 소원해진 아우, ‘또 다른 나’일 수 있다. 언니라는 존재는 살아가면서 힘들 때마다 찾아가 울면, 늘 어깨를 토닥여주며 위로해주는 사람이다. 늘 내 편이 되어주는 언니, 그런 언니가 나에게도 필요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깨닫는다. 나에게 언니가 필요하듯, 아우에게도 언니가 필요했구나. 힘든 아우를 위로해줘야 하는 손에 “생활의 때가/ 앉”아 언니 역할을 못 했구나. “풀어야 할 매듭”을 풀지 못하고 침묵했거나 서툴게 위로하려 했구나.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는 시간이 다 해결해주지 않는다. “한 사람 몫의 그늘을 옮기”는 것처럼 서로 참고 노력하는 정성과 마음이 우선이다. 말 이전에 몸의 언어가 필요하고, “최선을 다해 꽃 피우려는”(‘시인의 말’) 갸륵한 마음이라야 진심이 통한다. 그래야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랑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장미키스=최정란. 시산맥. 154쪽/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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