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만찬’, 공영방송의 새로운 시선

김리은 ize 기자 2018.12.17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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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만찬’, 공영방송의 새로운 시선


지난 7월, KBS ‘거리의 만찬’은 박미선, 김지윤 박사, 이정미 정의당 대표 등 세 명의 여성 MC가 진행하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 첫 에피소드 ‘그녀들은 용감했다’에서는 13년 간 복직을 위해 투쟁해 온 KTX 여승무원들을 찾아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자’는 걸그룹 레인보우 지숙이 합류해 최북단 전선인 강원도 고성군을 찾아가 남북관계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을 들었다. ‘그녀들은 용감했다’의 방영 후 KTX 여승무원들의 복직이 이뤄지는 성과도 있었다. 이후 11월에 정기편성된 ‘거리의 만찬’은 이정미 대표 대신 김소영 전 MBC 아나운서가 출연하고, 그간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아주 보통의 학교’에서는 강서구 특수학교 논쟁을 다루며 특수학교가 적어 장애를 가진 자녀의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학부모들을 만났다. ‘천 개의 낙태’는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직접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머리가 뭐라고’에서는 두발자유화 논쟁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학생들의 의견을 들었고, ‘엄마는 처음이라서’는 논란이 첨예했던 ‘맘카페’ 문제를 다뤘다. 21일에는 ‘~’를 다루며, ~를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할 예정이다. 장애인, 여성, 학생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가진 문제를 당사자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시도는 기존 시사 프로그램과는 다른 접근이었다.

‘그녀들은 용감했다’와 ‘천 개의 낙태’를 연출한 이승문 PD는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첨예한 갈등 현장에 묻혀 있던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의 시선으로 볼 때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을 지향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성 MC들이 현장에 직접 찾아가는 형식은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시도다. 이승문 PD는 “MC들이 여성이 아니었다면 낙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을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천 개의 낙태’에서는 낙태 수술을 한 후 상한 몸을 위해 혼자 삼계탕을 먹었다는 사례집의 이야기에 기반해 MC와 당사자들이 삼계탕을 먹었고, ‘아주 보통의 학교’에서는 장애 자녀를 출산하고 사회적 편견을 걱정하며 미역국을 먹었을 어머니들의 마음에 착안해 MC들과 학부모들이 함께 미역국을 먹기도 했다. 세 명의 MC가 차를 타고 출발해 차 안에서 이슈에 대해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마치 관찰 예능 프로그램과 비슷한 형식으로 브리핑을 하고, 주제의 당사자들과 만나 토크를 하며, 그들과 식사를 함께 한다. ‘거리의 만찬’은 예능 프로그램의 다양한 형식들을 가져와 활용하면서 당사자들의 입장을 점점 더 깊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승문 PD에 따르면 “이야기를 어떻게 잘 전달할 것이냐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결과다.



‘천개의 낙태’를 제작할 당시 이승문 PD는 “아무도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경험했는지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에 녹화 전주까지 출연하실 분들을 섭외하는 데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고 말했다. “단순히 공감을 표하기보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찬반에 대한 결론을 내리거나 단순히 낙태 경험자들이 고생하고, 여성들이 힘들고, 여기에 공감하니까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당사자의 목소리를 최대한 잘 들으려는 시사 프로그램의 등장은 지금 시대의 변화와도 닿아 있다. 이승문 PD는 “2014년 당시 방영된 ‘거리의 만찬’을 연출했던 남진현 PD가 현재 총괄 연출”로, “지난해 말과 올 초에 있었던 파업 기간에 시사교양 PD들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그때 기획안을 받았는데 그 중 하나가 ‘거리의 만찬’이었다”고 말했다. 현장을 찾아가고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다는 큰 골격만 유지한 채 새롭게 기획했고, 특히 “2014년과 2018년 사이에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여성 MC만으로 이루어진 시사 프로그램이라면 사회 흐름을 반영한다는 당위성을 갖는 동시에 프로그램으로서도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생각해 여성 MC들을 섭외”했다. 또한 현재 ‘거리의 만찬’을 연출 중인 다섯 명의 PD(박상욱, 이승문, 이이백, 조현웅, 윤대희)는 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PD들로, 회사 내부에서 가장 저연차로 구성됐다. “시사 프로그램을 기획했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만큼 대중의 정서와 변화에 감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제작하는 사람, 진행하는 사람, 나와서 말하는 사람 모두가 바뀌었다.

‘거리의 만찬’은 KBS의 11월 개편과 함께 ‘명견만리’가 방송되던 시간대에 정규 편성됐다. 당시 개편을 통해 ‘콘서트 7080’과 ‘VJ특공대’등 장수 프로그램들이 폐지되는 변화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이 개편이 기존의 오래된 시청자층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용감했다’는 방송 후 SNS에서 상당히 많이 언급되었다. 이는 파일럿 프로그램이 흔해지고 지상파가 이전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이승문 PD는 “방영 당시 반응한 시청자는 시사 프로그램을 좋아한다고 여겨졌던 50대 남성들이 아니라 20~49세의 여성들이 많았고, 이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확보하지 못했던 시청자층”이라고 말했다. ‘거리의 만찬’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프로그램이 필요한 이유다.



이승문 PD는 “사람들이 그냥 살면 들리지 않을 이야기를 굳이 찾아가서 매주 1시간씩 듣는 행위 자체가 공영방송의 역할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며 ‘거리의 만찬’에 대해 “공영방송의 원초적인 형태를 녹인 프로그램”이라 정의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의 진짜 이야기를 다뤄도, 여성 MC들이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해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시청자들이 본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프로그램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이승문 PD의 말처럼, ‘거리의 만찬’은 지금의 세상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다. 그 관점이야말로 KBS가 지금 해야할 일이 아닐까. 다른 시선의 시사 프로그램이 등장하자,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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