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철씨(55·왼쪽)와 기자(오른쪽)가 폐지가 모인 손수레를 붙잡고 있다. 폐지를 최대한 많이 쌓으면서, 쏟아지지 않게 하는 게 관건. 상자 한쪽이 밑으로 쏟아지려 해, 기자가 재빨리 붙잡고 있다. 비만이지만, 움직임이 빠르다./사진=남형도 기자, 화단 위에 올려 놓은 셀카
'폐지'를 줍고 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늘 빨리 버려서 없애야 할 대상이었다. 특히 상자는 쌓일수록 골치였다. 부피가 커, 베란다를 오가기 여간 불편한 게 아녔다. 그럴 때면 매주 목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재활용 분리수거 날 말이다. 양팔에 상자를 가득 안고 내려가,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그렇게 개운할 수 없었다. 텅 빈 베란다를 보면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픽=유정수 디자인기자
그리고 몇 달 뒤, 한 사건을 접했다. 경남 거제서 20대 청년이 폐지 줍던 할머니를 때렸다고 했다. 청년은 180cm, 할머니는 130cm라 했다. 무려 40분간 주먹질, 발길질이 이어졌다. 이유도 없었다. 그냥 때렸고, 어쩔 수 없이 맞았다. 그날 새벽, 할머니는 숨졌다. 기사를 보고, 잔혹함에 치가 떨렸다. 동네서 만난 할머니와 그 사건의 상(像)이 겹쳐, 며칠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잠깐이지만, 치열한 생존의 기운을 느꼈었다. 연민과 존경의 맘이 뒤섞인. 그렇게 함부로 짓밟힐 삶이 아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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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폐지를 주워보기로 했다. 전국고물상연합회를 수소문해, 고물상 몇 군데 연락처를 얻었다. 그리고 연락을 했다. 대부분 꺼렸다. "폐지 줍는 분들이 싫어할 것"이라 했다. 이유를 물었다. "언론에 나오면 자녀들이 보고 부끄러워해서"라고 했다. 다행히 서울 송파구 쪽 고물상 도움을 받았다. 폐지 줍는 이와 동행할 수 있다고 했다. 장애가 있는 분이라 했다. 12일 오전 9시, 찾아가기로 했다. 똑같은 하루를 살아보기로 했다.
잘나가던 '주방장'이었다
세 발 자전거를 탄 최진철씨(55)가 손수레를 묶어둔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인근 동네 주민들이 그의 손수레에 폐지를 조금 모아뒀다. 이는 큰 힘이 된다. 몇몇 비(非)양심 수거인들은 손수레 안에 있는 폐지도 몰래 주워간다고 했다(벼룩의 간을 내먹어라)./사진=남형도 기자
그는 세발자전거에 몸을 실었다. 두 발 자전거는 타기 힘들다고 했다. 동네 공원 인근에 폐지 줍는 '손수레'를 세웠다고 했다. 집 앞에는 못 세우게 한단다. 자전거를 타면서도 그는 "빠르지않느냐"고 계속해서 물었다. 걸어가는 기자를 배려한 말이었다. 괜찮다고 했다(사실 좀 빨랐다). 그래도 서서히 몸도 풀 겸, 경보를 걷다가 조깅을 하며 따라갔다. 추위가 조금씩 가셨다.
가는 길, 궁금했던 얘길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느냐고. 그는 8년 전 얘길 꺼냈다. 솜씨 좋은 '중식 주방장'이었다.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땐 TV에도 나왔었다"며 웃었다. 불행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일하다가 쓰러졌다. '뇌경색(뇌혈관이 막히고 그 앞 뇌 조직이 괴사하게 되는 질환)'이었다. 분초를 다퉈 병원에 가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후유증이 남았다. 몸 오른쪽은 재활로 다소 회복됐지만, 왼쪽은 맘대로 안됐다. 그래서 장애가 생겼다.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힘들어졌다. 하루아침에 삶이 달라졌다. 주방장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일을 그만둔 뒤, 밥줄이 끊겼다. 기초생활 보장 수급자가 됐다. 정부 지원금이 있지만, 중학생 아들, 고등학생 딸을 키우느라 생활비조차 빠듯했다. 벼랑 끝에서 시작한 게, 폐지 줍는 일이었다. 최씨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 했다. 몸도 맘도 고된 일이었다. 처음엔 제대로 모으지도 못했다. 많이 나오는 가게는, 이미 다 임자가 있었다. 걷기만 해도 체력이 부쳤다. 조금씩 모아가며 시작했다. 주말도 없이, 매일 부지런히 다녔다. 그렇게 8년, 그 마음에 감동한 이들이 생겼다. 그에게만 폐지를 모아주는, 고마운 이웃들이다.
최대한 많이 쌓기, '상자 펴기' 전쟁
통상 박스는 이렇게 포장이 남은 채 버려진 경우가 많았다. 이를 그대로 손수레에 실으면, 몇 개 담지 못한다. 그래서 테이프를 다 뜯어야 하는데, 노하우가 있다. 빨간색 동그라미 부분을 주먹으로 쿵쿵 치면, 테이프와 상자 간 틈새가 벌어진다. 쉽게 뜯을 수 있다. 최진철씨(55)에게 배웠다./사진=남형도 기자 왼손
일단 묵묵히 돕기로 했다. 일하는 것도 힘들 텐데, 말을 계속 거는 게 미안했다. 옆에서 돕다 보면 그를 알게 되겠지 했다.
상자 해체가 관건이었다. 대부분 상자째 버리는데, 이를 쭉쭉 펴는 일이었다. 최대한 많이 담기 위한 작업이다. 상자를 둘러싼 테이프를, 상자 귀퉁이에 박힌 스테이플러 철심을 뜯었다. 처음엔 잘 안 뜯겼다. 손톱으로 기를 써봐도. 오랜 시간 들러붙은 테이프가 애를 먹였다. 최씨의 능숙한 손길을 지켜봤다. 커닝했다. 요령이 있었다. 상자 한쪽을 주먹으로 '탁탁' 친 뒤, 테이프 틈새가 벌어지면 죽 뜯는 것. 옆에서 보고 따라 했더니 잘됐다.
두꺼운 상자는 더 쉽잖았다. 단단해서 주먹으로 치는 것도 아프고 안 먹혔다. 맘이 앞서서, 바닥 근처에서 상자를 뜯다 아스팔트에 두 손이 긁혔다. 왼쪽 검지와 오른쪽 주먹 부분에 상처가 났다. 피가 조금 흘렀다. 찬 바람이 파고들자, 통증이 느껴졌다. '장갑을 낄 걸'하는 후회가 됐다. 폐지 줍기를 만만히 본 탓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최씨가 "단단한 상자는 발을 쓰라"고 했다. 그를 따라 철심이 박힌, 네 귀퉁이를 발로 밟았다. 그러니 찢어지더라도 분해가 됐다.
박스를 분해하다, 아스팔트에 긁혀 왼쪽 검지손가락에 생긴 상처. 장갑을 끼고 왔어야 했는데, 만만히 봤다가 큰코 다쳤다. 넷째 손가락을 잘 보면, 살쪄서 반지가 작아진 걸 확인할 수 있다(TMI)./사진=남형도 기자
최씨는 "손이 시리지 않냐, 많이 시릴 것"이라며 몇 번이고 물었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괜찮다고 했다. 사실 안 괜찮았다. 손이 얼얼했다. 상처가 난 쪽 감각이 무뎌질 정도였다. 영하 날씨 바람이 계속해서, 맨살만 때렸다. 그런데도 몸을 계속 움직이니 땀이 줄줄 났다. 허리를 몇 번씩 굽혔다 폈다를 반복해야 했다. 상자는 곧 돈이란 생각뿐이었다. 열심히 주워, 최씨 하루 생계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목숨 건 '손수레 끌기'
손수레를 끌고 가는 최진철씨(55) 오른편 도로로 흰색 트럭이 지나가려 하고 있다. 좁다란 도로라 피할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늘상 안전 위험에 노출돼 있다. 최씨도 오토바이 사고로, 허리뼈가 부러졌다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손수레는 묵직해져 갔다. 기자가 끌겠다고 나섰더니, 최씨가 만류했다. 그가 하겠다고 했다. '뇌경색 재활'이라고 했다. 그게 운동이라고. 알고 보니, 걷는 게 불편해, 손수레 무게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렇게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었다. 양발 속도가 안 맞아도, 우직하게 갔다. 무게를 덜어주려 손수레에 힘을 줬더니, 그러지 말라고 했다. 무게를 더는 게 방해가 됐던 것. 그래서 오르막에서만 힘을 보탰다. 걷는 것도 리듬을 맞췄다. 오른발은 시간을 길게, 왼발은 짧게. 그렇게 걸었더니 호흡이 잘 맞았다.
도로 한 켠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책들. 책은 일반 파지보다 가격이 두 배 이상 높닥 했다(1kg에 110원 정도).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날 수집한 책은 약 55kg 남짓이었다. 별도 상자에 잘 보관했다./사진=남형도 기자
그렇게 조심해도 사고는 났다. 도로 위에서 오랜 시간 손수레를 끄니, 어쩔 수 없었다. 최씨는 "몇 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허리뼈 두 개가 나갔다"고 했다. 오토바이가 돌진해, 갑자기 최씨를 들이받았다고 했다. 순간 기절해서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었다. 돈이 많이 들어, 치료도 제대로 못 받았다고 했다. 후유증으로 아직도 허리가 매우 아프다고 했다. 오래 걷기가 힘들다고. 기침과 거친 숨을 내쉬다, 정 힘들면 잠깐씩 앉아 쉬는 일이 반복됐다.
기자에게도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굵직한 상자가 안 쪼개져, 바닥에 내려놓고, 발을 올려놓았다. 의욕이 앞서던 찰나, 발 오른쪽으로 차가 쌩 지나갔다. 불과 몇 센티 차이로 살았다. 발을 밟힐 뻔했다. 낮에도 찬 바람으로 상기됐던 얼굴이, 별안간 확 달아올랐다.
함께 사는 이웃, 뺏어가는 이웃
홀로 버티는 이들에게도, 함께하는 이웃들은 있었다. 폐지를 줍다 들른 한 편의점 점주 부부에게 받은 믹스커피 두 잔. 잠시 쉬면서 마시는 따뜻한 커피에 몸과 맘이 다 녹았다./사진=남형도 기자
편의점 안엔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물건을 받고, 나온 것들이다. 부부는 "그에게만 상자를 준다"고 했다. 그의 사정도 잘 알았다. "안타깝게 됐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도 없다"며 용기를 줬다. 횡재한 듯 상자를 열심히 뜯고 모았다. 점주는 "이렇게 깔끔하게 치워주니 우리도 좋다"고 했다. 다 정리한 뒤, 커피 한잔하고 가라고 했다. 정겨운 믹스커피였다. 잠시 숨을 골랐다. 잊고 있던 땀이 그제야 보였다.
또 다른 상점에 갔다. 가게 뒤편에 폐지를 모아 놓은 공간이 있었다.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주인이 모아준다고 했다. 그런데, 폐지 주위엔 어깨높이 정도 오는 철망이 둘러싸여 있었다. 최씨에게 "직접 만든 것이냐"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문을 잠가두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가져간다고 했다. 정리하려 하는데, 그 앞에 차량이 있었다. 사람 하나 들어갈 공간이라, 손수레 댈 곳이 없었다. 전화 걸어 차를 빼달라고 했다. 그제야 손수레를 가까이 댈 수 있었다.
최씨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를 바닥에 놓았다. 한쪽 모퉁이가 완전히 깨져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 해체 작업을 시작했다. 큰 상자를 들거나, 무거운 것들을 들 땐 최씨가 힘겨워했다. 그땐 재빨리 가서 눈치껏 도왔다.
정리를 다 끝내고 손수레를 다시 잡으려 하자, 최씨가 기다리라 했다. 한쪽에 놓인 긴 호스를 집더니, 물을 틀었다. 더러워진 곳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치워줘야 한다고 했다. 물을 시원하게 틀어 이곳 저곳에 샤워를 해줬다. 바닥이 금세 말끔해졌다.
돕는 이웃만 있는 건 아녔다. 뺏는 이웃도 있었다. 정리에 집중하느라 한눈팔고 있을 때였다. 한 아줌마가, 오전에 정리해 둔 상자 속 책들을 가져가려 했다. 다행히 이를 눈치챘다. "그거 가져가시면 안 된다"고 재빨리 말했다. 그러니 "가져가도 되는 줄 알았지"하고 태연하게 대꾸한 뒤 갔다. 최씨는 "일하고 있을 때 저렇게 가져가는 사람들 있다"고 했다. 염치가 없었다. 오전 내내, 찬 바람에 땀 흘려가며 모은 것들이었다.
165kg 모았는데, 1만1000원 벌었다
첫번째 폐지 수집을 마친 뒤 손수레의 모습. 총 무게는 165kg(파지 110kg, 책 55kg). 최진철씨(55)가 받은 금액은 1만1000원이었다. 3시간 넘게 열심히 모았으니, 시간당 약 3500원 정도 번 셈이다./사진=남형도 기자
이제 고물상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손수레가 위태롭게 굴러갔다. 최씨는 매우 무겁다며, 손잡이 안에 들어가 앞에서 끌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3시간 가까이 부지런히 담은 파지들이, 수북이 쌓인 채 손수레가 뒤뚱뒤뚱 흘러갔다.
최씨는 "오늘은 많이 모았다"며 "6500원 정도 되겠다"고 했다. 귀를 의심해 다시 물었다. 많이 나온 게 6500원밖에 안되냐고. 그랬더니 "평소엔 4000원 정도밖에 안된다"고 했다.
고물상에 도착했다. 무게를 잴 시간, 간절한 맘으로 기다렸다. 폐지를 와르르, 책더미도 같이 쏟았다. 잠시 뒤 고물상 사장이, 최씨에게 1만1000원을 건넸다. 무게가 얼마냐고 했더니 파지는 110kg, 책은 55kg이 나왔단다. 총 165kg이었다. 저울이 어딨느냐고, 언제 쟀냐고 물었다. 바닥에 있는 철판이 저울이라 했다. 큰 철판이 큰 저울, 작은 철판이 작은 저울이었다. 기자가 올라가 보니 94kg이란 숫자가 떴다. 고물상 관계자가 "가방이 무거운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제 몸이 원래 무겁다"고 양심 고백했다(4문단에서 확인 가능).
철판으로 된 저울 위에 폐지를 담은 손수레를 올리면, 무게가 얼마인지 달아서 그만큼 금액을 주는 방식이었다. 94kg은 기자 몸무게와 가방을 합친 총 무게다. 몸무게는 비밀이다(정답은 기사 본문에). 원래는 덜 나가는데 겨울 휴가를 다녀온 뒤 살이 더 쪘다(변명)./사진=남형도 기자
점심시간 10분, 식사는 우유 하나
아침도 안 먹은, 기자와 최진철씨(55)의 첫 끼니는 다름 아닌 우유였다.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같이 우유 한 잔 했다. 이빨이 안 좋은 최씨는 음식을 잘 못 먹는다고 했다. 실제로 보니, 누렇게 변한 치아가 반토막 나 있었고, 어금니도 몇 개 없었다. 치과 치료를 받을 돈이 없다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오후에도 같은 일이었다. 텅 빈 손수레를 보고 있자니, 언제 또 채우나 싶었다. 그래도 오전보단 훨씬 업무가 수월해졌다. 최씨가 손수레를 끌고, 기자는 그보다 한발 앞서 가며 상자가 있는지 구석구석 물색했다. 최씨는 "이걸 하다 보면 정말 상자밖에 안 보인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오후 2시쯤, 편의점 앞에서 최씨가 쉬다 가자고 했다. 그제야 첫 끼니를 때우자고 했다. 아침도 안 먹었단다. 편의점에 함께 들어갔다. 우유를 먹겠다고, 기자에게도 고르라고 했다. 최씨는 500㎖(밀리리터) 흰 우유를, 기자는 250㎖ 딸기 우유를 골랐다(초딩 입맛). 가격은 2750원. 최씨가 본인이 사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말렸다. 차마 사라고 할 수 없었다. 파지 55kg 가격과 같았다. 최소한 2~3시간은 모아야 가능한 돈이었다.
플라스틱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놓고, 편의점 앞에 앉아 같이 우유 한잔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그러냐"고 물으니, "시간이 없다"고 했다. 최씨는 빨대를 가져오며, 이렇게 안 마시면 힘들다고 했다. 치아도 안 좋다고 했다. 유심히 보니, 맨눈으로 봐도 상태가 심각했다. 누렇게 변한 데다 반 동강이 났고, 어금니 여러 개도 없었다. 치과 치료를 안 받았냐고 물었다. 대답이 예상됐다. "파지 주워서 치과 치료를 어떻게 받겠어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둘 다 허리를 굽힌 채 남은 우유를 끝까지 마셨다.
마지막 손수레가 차고, 손을 맞잡았다
낡아서 뜯어진 장갑을 벗자, 최진철씨(55)의 맨손이 드러났다. 뇌경색 후유증으로 혈액순환이 잘 안된다고 했다. 기자에게 "고생 많았다, 고맙다"며 손을 잡아주는데, 냉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도 마음은 따뜻해졌다./사진=남형도 기자
최씨가 별안간 기자 오른손을 잡았다. 그러더니 오늘도 몇 번이나 반복한 말을 또 건넸다. 손 시리지 않았냐고. 삶의 잔상이 고스란히 박힌, 투박하고, 거칠고, 두터운 손이었다. 똑같은 대답을 했다, 괜찮다고. 그러면서 최씨 손 위에 손을 얹었다. 평소에 참 안 하는 일인데,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그의 양손이 더 차가웠다. 낡고 다 헤진 장갑이, 영하 추위를 얼마나 막았을까 싶었다. 왜 이렇게 차갑냐고 했더니, 혈액순환이 잘 안 돼 그렇다며, 얼버무렸다. 손가락 끝을 안으로 오므린 채, 다시 따뜻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차가운데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고마움을 표했다. "덕분에 제가 오늘 편했다, 폐지도 많이 줍고, 평소보다 많이 받았다, 힘들 텐데, 고생했다, 빨리 들어가시라, 어떻게 가느냐, 역방향은 저쪽이다"라고. 짧고, 세련되지 않지만, 최대한 잘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전한 말 몇 마디. 그 말이 참 따뜻했다.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들. 그가 폐지를 줍는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됐단 것. 인생이란 게 얄궂어서 누구든 그렇게 될 수 있단 것. 그러니 이들을 외계에 사는, 별나라 사람쯤으로 볼 게 아니라, 이웃으로 보면 좋겠다는 것. 관심을 두는 것만으로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예를 들면, 상자 테이프를 뜯어 납작하게 접은 뒤 내놓는, 이런 소소한 것들 말이다. 느릿느릿 차도로 가는 이들을 충분히 기다려주거나. 무거워 휘청거릴 때 말없이 조금은 밀어준다거나. 돈 안 드는 따뜻한 말 한마디 정도 건넨다거나, 그런 것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손수레를 끌고 돌아가는 최진철씨(55) 머리 위로 햇살이 떨어졌다. 뒷모습이 커 보였다./사진=남형도 기자
불편한 몸으로 200kg이 넘는 손수레를 끌고, 정직하게 흘린 땀으로 1만5000원을 벌고, 자녀들이 놀 때 용돈을 줘야 한다며 그 돈을 꼬깃꼬깃 지갑에 넣고, 밥을 차려주러 간다며, 부지런히 세발자전거를 타고 홀연히 사라지는 최씨 뒷모습은 빛났다.
최진철씨(55)와 기자가 하루 종일 폐지를 모아 번 돈은 1만5000원. 치즈김밥 네 줄도 못 사먹는 돈이다. 평소엔 1만원도 못 번다고 했다. 그런 생각들 때문에 분식집을 그냥 지나쳤다./사진=남형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