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터지면 수천억, 보험 약관은 왜 지뢰밭이 됐나

머니투데이 전혜영 기자 2018.12.07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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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폭탄 고무줄 금융약관]<2>약관은 무조건 작성자 불이익? 법원 판례 엇갈리는데 소송 제약

편집자주 자살보험금과 즉시연금 등 금융회사의 약관을 놓고 수천억원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뭐가 문제길래 약관은 금융회사의 덫이 된 걸까. 약관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약관을 둘러싼 분쟁을 해소해 소비자를 보호하고 금융회사도 짐을 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살펴봤다.

[MT리포트]터지면 수천억, 보험 약관은 왜 지뢰밭이 됐나


금융감독원은 금융상품 약관으로 민원이 제기되면 소비자에게 유리하게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약관을 작성한 주체가 금융회사인 만큼 약관에 문제가 생기면 금융회사가 책임지라는 취지다. 이른바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이다. 하지만 이 원칙이 오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즉시연금에서 사업비를 떼지 말고 보험금을 지급하라는 결정이다.

금융학계 한 관계자는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은 약관으로 소비자가 불이익을 입게 되면 작성자인 금융회사가 불이익을 받고 소비자에게 피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인데 소비자에게 불이익이 없는데도 소비자 편을 들어주는 쪽으로 이용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이 원칙이 소비자가 부당한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이용돼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금감원의 민원 조정 결정에 금융회사가 불만이 있어도 문제를 제기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점도 문제다. 금감원에 금융상품과 관련해 민원이 제기되면 금감원은 소비자와 금융회사간 조정을 시도하고 실패하면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에 올린다. 민원이 일단 분조위에 올라가면 금융회사가 입장을 설명할 기회가 없고 분조위 결정을 수용하든지, 거부하든지 선택밖에 없다.

분조위 결정을 거절하면 소송으로 가야 하지만 이 경우 금감원이 검사와 제재 등으로 해당 금융회사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즉시연금 추가 지급과 관련해 삼성생명과 한화생명 등이 소송을 결정한 것도 윤석헌 금감원장이 국회에서 검사 등으로 압박하지 않겠다고 밝힌 뒤였다.



금융회사가 승소했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과거 자살보험금 미지급 사태만 봐도 법원은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에 대해선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금감원은 법원 결정과 관계없이 보험사에 검사와 제재 권한을 동원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까지 다 지급하도록 강제했다.

더 큰 문제는 금감원이 국회에 계류 중인 '금융소비자보호법'에 2000만원 이하의 소액 분쟁에 대해서는 금융회사가 분조위 결정을 무조건 수용하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을 반영하려 한다는 점이다. 금감원은 약관 문제의 경우 분조위 결정을 비슷한 약관에 일괄 적용할 방침이기 때문에 건당 2000만원이 보험사로선 수천억원으로 커질 수도 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약관은 미래 상황 변화와 관련한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해석 문제로 분쟁이 생겼을 때 법적 판단을 받고 판례를 쌓는 일이 필요하다"며 "문제는 소송을 하면 소위 금융당국에 찍히게 되니 약관에서 문제가 터지면 퇴로가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분조위 결정을 거부하면 금감원이 검사 등을 통해 중징계를 내릴 수 있어 분조위 결정은 사실 법 위에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약관에 없어도 보험금 줘라? 그때그때 다른 고무줄 잣대=가장 큰 문제는 금융당국이 소비자 보호라는 명목하에 약관에 없는 보험금도 지급을 권고한다는 점이다.

일례로 금감원은 내년부터 판매할 새 암보험 상품 약관에 연명의료결정법에 해당하는 말기암 환자에 대한 치료를 보험금 지급 대상에 포함하기로 했다. 약관은 지난 10월1일자로 모두 바꿨지만 약관 변경 전부터 금감원은 치료가 어려운 말기암 환자에게 보험금 지급을 권고했다. 암보험은 암의 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을 보장하는데 보험사로선 치료가 불가능해 애초에 보험료에 반영하지도 않았고 약관에 지급 규정도 없는 보험금을 금융당국의 권고에 따라 내준 셈이다.

약관에 없던 내용을 당국이 임의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과거에는 장기보험의 질병·수술 담보 약관에 '관혈', 즉 피를 봐야 수술에 해당한다는 정의가 명시돼 있었다. 이후 의학이 발달하면서 레이저 등을 사용해 피를 보지 않는 치료 방법이 늘어나자 금감원은 '기존 수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경우 피를 보지 않았더라도 소비자 보호를 위해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조항을 약관에 넣도록 했다. 이 결과 수술을 하면 한 번만 지급하면 되는 보험금을 레이저를 통해 여러 번 치료가 이뤄지면서 수차례 보험금을 지급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금감원이 약관 문구 하나까지 따져 보험금을 주라고 하듯 보험사도 엄격히 따지면 약관에 없어 주지 않아도 되는 보험금인데 금감원이 권고하면 기존 계약까지 소급해 줘야 한다"며 "약관에 있어도 주고, 없어도 주라는 건데 이런 식으로 보험료를 받지도 않은 보험금 지급이 늘어나면 보험료가 올라가 선량한 가입자가 피해를 보는 상황이 생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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