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투데이

2018 올해의 인물들│김혜수가 있는 자리

이예지(‘GQ’ 에디터) ize 기자 2018.12.06 09:03
‘ize’는 이번 한 주 동안 2018년에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리고 앞으로도 기억해야할 ‘2018 올해의 인물들’을 선정했다. 하루에 두 명씩, 총 10명이다. 여덟번째 인물은 배우 김혜수다.

* 영화 ‘국가 부도의 날’ 내용이 있습니다.


김혜수는 곧다. 그리고 자연스럽다. 흔들림 없는 지긋한 시선, 정확한 발음과 발성, 어떤 것도 감출 것이 없다는 듯 굽지 않은 너른 어깨를 지닌 이 배우의 품위와 풍채는 어떤 배역에도 지극한 안정감을 선사한다. 시뻘게진 얼굴로 파들파들 떨며 울고 웃는 광기를 전시해야만 연기자로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듯한 일부 남성 배우들과는 달리, 삼십여 년 간 ‘강한 여성’으로서 아이코닉한 존재였던 김혜수는 넘치는 연기를 한 적이 없다. 강할수록 덜어내고 절제하며 예리하게 벼렸다. 백지장처럼 표독스러운 얼굴로 저주를 퍼붓던 장희빈일 때도,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코웃음 치던 정마담일 때도, “엣지 있게!”를 카랑카랑 외치던 패션지 편집장일 때도, 후배 형사를 꾸짖는 베테랑 형사일 때도, 딸에게 “죽지 마, 죽을 때까지”라고 나지막이 이르던 마우희일 때도, 그는 정확했다. 과잉된 감정에 도취돼 부산을 떤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그가 ‘국가부도의 날’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을 제 옷처럼 입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도를 지키는 인물, 한시현은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성실한 직업인이다. 누군가의 아내도, 엄마도 아니고 구구절절한 사연도 없다. 다만 자신의 상식과 정의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힐 때 그는 강해진다. 국민을 희생해 재벌기업을 살리려는 부당한 지시에 반발하고, 절망하지만 곧 나아갈 길을 모색한다. 재정국 차관에게 맞서 IMF를 반대하는 장면에서 분노의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나왔지만, 김혜수는 감독에게 해당 테이크를 쓰지 말자고 제안했다. “감정이 안 들어갈 수 없지만,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 장면은 김혜수의 한시현이 온전히 관객들을 설득하는 순간이 된다.

덜어내고 덜어내 표현하고자 하는 바에 이르는 한시현의 정공법과는 대조적으로, 유아인의 윤정학은 현란한 수사적 장식을 멈추질 못한다. 이것은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존재감을 과시해야만 하는 어떤 남자 배우들의 고질적 습관이다. 국가 위기를 기회로 욕망을 성취하려는 인물이 굳이 이 서사에서 위악적인 양 죄책감을 느껴야만 할 필요가 있을까? 그 답은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오롯한 김혜수의 원톱 영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김혜수’라는 이름 세 자에도 여성 주연 영화였기에 제작이 거꾸러질 뻔했고, 여성 주연 영화였기에 남성 배우들이 선뜻 맡지 못했다는 ‘국가 부도의 날’ 배역은 영화가 완성된 후에도 어떤 욕심을 버리지 못한 채, 이상한 계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어쨌든 나라를 판 차관, 기회주의자 투기꾼, 특정 진영에 있었던 남자들은 그 위기를 통해 한탕을 제대로 해먹었고, 정의와 소신을 지키고자 했던 한시현은 실패했다. 그는 운전대를 붙잡고 길게 운다. 한 차례의 실패, 여기까지가 1997년의 이야기다. 20년 후 반복된 국가의 위기를 감지한 또 다른 여성이 한시현을 찾아오고, 한시현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난 팀으로 일해요.” 그리고 한시현의 나레이션이 이어진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고, 항상 깨어있는 눈으로 바라볼 것. 두 번 지기는 싫으니까.” 이 장면은 영화 밖에서도, 또 다른 층위의 의제에서도 공명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것. 김혜수는 18년 전, ‘이홍렬쇼’에서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는 상상을 해본 적 있냐”는 당연했던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광경은 가끔 상상해요. 그러나 그 자리에 꼭 제가 있는 건 아니죠. 남편도 아내를 위해 아침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라고 당연하지 않게 대답했다. 그는 남성 배우들의 뺨을 쓰다듬거나 목덜미를 잡고 어깨를 토닥이거나 ‘애기’나, ‘천사’라고 부르고, 여성배우들의 손등에는 정중히 키스해 화제를 낳는다. 즐겁고 기꺼운 균열을 내는 순간,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하는 힘이다.

여성 배우들에게 보내는 애정과 응원, 유대감은 김혜수를 말하며 빠질 수 없는 대목이다. 김혜수가 25년째 진행을 맡고 있는 올해 청룡영화상에서 ‘미쓰백’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한지민은 “늘 제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시는 김혜수 선배님, 항상 좋은 말씀을 해주신다. 정말 너무 감사하다”며 울먹였고, 김혜수도 눈물을 훔쳤다. 한편 김남주는 올해 더서울어워즈에서 ‘미스티’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오늘 꼭 이분을 말씀드리고 싶다. 김혜수 선배님께서 많이 격려해 주셨는데 나도 좋은 선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고, 김혜수는 그에 대해 “너무 잘해줘서 고맙다. 일종의 연대감이다”라고 밝혔다.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에 어울리는 여성 신인 배우들을 리스트업해 추천해 준 것도 유명한 일화다. 직접적 연관이 없는 여성 영화인들에게 김혜수는 자꾸만 감사의 대상으로 호출된다. 한 시상식 현장에서 천우희, 박보영, 한예리를 비롯한 여성 배우들이 김혜수에게 존경과 선망의 눈빛을 보내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한시현과 이아람의 2라운드처럼, 그들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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