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내시경 녹음하고 싶은데, "휴대폰 꺼주세요"

머니투데이 이동우 기자, 서민선 인턴기자 2018.11.28 05:24
글자크기

검진센터, 휴대폰 제출 요구 등 잇따라…"안전할 권리, 최소한의 자구책 막지 말아야"

/삽화=뉴스1/삽화=뉴스1


"수면 내시경 받으시죠? 휴대폰 전원은 끄고 들어오세요."

회사원 강모씨(31)는 이달 26일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서울 영등포구 한 검진센터를 찾았다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내시경 검사실로 들어오기 전 휴대폰 전원을 꺼달라는 간호사의 말 때문이었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수술실 막말 등에 불안감을 느낀 강씨는 수면 마취에 앞서 녹음 버튼을 눌러놓을 생각이었다.



강씨는 꼭 전원을 꺼야 하는지 이유를 물었지만 간호사는 내부 규정이 그렇다는 설명만 되풀이했다. 더는 말다툼을 하기 싫었던 강씨는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서도 왠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연말 직장인들의 막바지 건강검진이 한창인 가운데 수면 마취 녹음을 둘러싼 실랑이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일부 병원의 녹음 제지 행위는 환자의 알 권리 강화라는 최근 추세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한소화기내시경학회가 지난해 9월 30~59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가 받은 위내시경의 44.7%와 대장내시경의 80.3%는 수면 내시경(진정내시경)으로 진행됐다.

수면 내시경은 미다졸람이나 프로포폴 등의 수면마취제를 투여해 잠이 든 상태에서 위나 장을 검사한다. 신체적 통증이나 공포감 없이 비교적 편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어 검진자의 선호가 높은 편이다.

이처럼 수면 내시경이 보편화하는 추세지만 검진자가 마취된 상태에서 의료진이 막말 등을 한 사실이 수차례 알려지며 반감도 커지고 있다.


2013년 서울의 한 대형 건강검진센터 의료진이 수면 내시경을 진행하며 검진자의 항문에 손가락을 넣는 상습 성추행을 했다는 의혹 등 성폭력 사례도 나오고 있다.

평소 이 같은 불안감을 느끼던 회사원 박모씨(33)는 이달 초 서울 강남구 한 검진센터에서 녹음하려고 했지만, 병원 측의 사전 조치로 녹음하지 못했다. 당시 병원 측은 내시경 검사를 받으려면 휴대폰을 따로 보관해야 한다며 휴대폰 제출을 요구했다.

박씨는 "다른 검진을 받을 때는 아무런 제지를 안 하다가 수면 내시경에서만 휴대폰을 보관해야 한다고 했다"며 "얼떨결에 하라는 대로 했지만 병원에서 뭔가 숨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해당 병원에 이유를 묻자 "담당자가 없어서 답변해 주기 어렵다"고 밝혔다. 강씨가 검진을 받았던 영등포 검진센터 측은 "휴대폰 전원을 꺼달라는 요구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타인 간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이 경우에는 법적으로도 예외를 인정받을 수도 있다는 게 법조인들의 판단이다. 유희은 변호사는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녹음하는 것은 자력구제 차원 등 위법성 조각사유라고 법원에서 판단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현호 의료전문 변호사도 "환자의 알 권리는 인간의 존엄권처럼 우선이 되는 기본권"이라며 "자력구제 차원에서 위법성 조각사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진자의 녹음을 막는 것은 최근 의료과정에서 투명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요구에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무면허·대리수술 문제가 불거지자 국공립 병원을 대상으로 수술·검진실 CCTV(폐쇄회로화면) 설치 의무화를 검토하고 있다.

강태언 의료소비자연대 사무총장은 "지금까지 검진이나 수술·치료 과정 등이 공급자 중심에서 이뤄지다 보니 환자를 성희롱하고 대리 수술까지 발생하는 상황"이라며 "의료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환자의 자구책으로 녹음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강 사무총장은 "공급자 입장에서는 자기들을 감시하고 믿지 못하는 모양새여서 불쾌할 수는 있다"면서도 "하지만 무엇보다 환자의 생명권과 안전할 권리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