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받아내는 것 보다 감방 보내기가 더 쉽다고?

머니투데이 황국상 기자 2018.11.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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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 [서초동살롱] 형사보다 민사가 더 까다로운 이상한 법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그래픽=임종철 디자인기자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에게서 돈을 받아내는 것보다 그를 감방에 보내는 게 더 쉬운 경우가 있다. 민사재판보다 형사재판에서 입증이 까다롭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반대다.



최근의 대법원 확정 판결에서도 이런 이상한 현상이 확인됐다. 형사소송에서 횡령죄로 유죄가 확정된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던 원고들이 최근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민사법정의 재판부가 "형사재판에서 인정된 사실을 그대로 채용하기 어렵다"며 종전 확정판결이 잘못됐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법조계 전문가들은 "형사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는 것보다 오히려 민사재판에서 손해배상을 받는 게 더 어려운 우리 사법부의 현실이 다시 확인됐다"며 법원을 성토했다.



문제의 사건은 2013년 스포츠토토의 소액주주들이 조경민 전 오리온그룹 전략담당 사장을 상대로 낸 주주대표소송이다. 스포츠토토가 조 전 사장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자 소액주주들이 나서서 회사에 대한 조 전 사장의 손해배상을 요구한 것이다. 스포츠토토는 1·2심에서는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3심에서 원고들을 지원하기 위해 공동소송참가인으로 나섰다.

그런데 대법원은 지난 9일 이들 소액주주들의 상고를 기각,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확정했다. 조 전 사장이 회사에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확인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 전 사장은 2007년 10월부터 회사 자금을 빼돌리기 위해 친형 등과 공모해 투표용지, 영수증 용지 등을 허위로 발주하고 15억7000여만원 상당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2012년 6월 기소됐다.


1·2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조 전 사장은 대법원에서 한 차례 파기환송 등을 거친 끝에 최종적으로 2014년 9월 징역 2년6개월 실형이 확정됐다. 처음보다 형량이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조 전 사장이 친형 등과 공모해 거래처에 허위 발주를 하는 방법으로 투표용지와 영수증 용지 등의 대금 15억7000여만원을 횡령했다'는 사실은 일관되게 유죄로 인정됐다.

조 전 사장의 형사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스포츠토토 주주 93명은 조 전 사장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냈다. 조 전 사장이 횡령 행위로 회사에 손해를 끼쳤으니 조 전 사장은 회사에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1심은 원고들의 주장을 전부 받아들여 조 전 사장이 스포츠토토에 15억7000여만원 전부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1심 재판부는 "동일한 사실관계에 대해 이미 확정된 형사판결이 유죄로 인정한 사실은 유력한 증거자료가 된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와 반대되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며 횡령 범죄의 유죄가 확정된 조 전 사장이 회사에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2심에서 이같은 판단이 뒤집혔다. 앞서 확정된 대법원 형사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즉 △조 전 사장이 횡령죄를 범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조 전 사장으로 하여금 스포츠토토에 손해를 배상하게 하려면 조 전 사장의 횡령 사실을 원고가 입증해야 하며 △원고가 이를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 전 사장은 손해배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2심 재판부의 판단이었다.

2심 재판부는 "업무상 횡령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불법영득의사(불법으로 다른 이의 재산을 빼돌리려는 의사)를 실현하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며 "그런데 실제 업무수량보다 많은 양을 발주하고 그 대금을 지급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만으로 조 전 사장이 이 대금을 횡령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또 "거래업체가 스포츠토토로부터 받은 납품대금을 다시 조 전 사장에게 되돌려주는 등으로 조 전 사장이 대금을 빼돌렸다는 점이 인정돼야 한다"며 "형사 재판에서는 '스포트토토 마케팅부가 영업부 주문수량보다 많은 수량을 발주한 사실이 있다'는 관련자 진술에만 기초해서 조 전 사장이 자금을 횡령했다고 봤다. 횡령죄의 법리로 볼 때 형사재판의 확정판결은 조 전 사장의 횡령사실을 인정할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원고들에게 조 전 사장의 자금 횡령을 입증할 책임이 있는데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이를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조 전 사장이 원고들과 스포츠토토에 횡령행위를 했음을 전제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청구는 이유가 없다"고 했다. 최근 대법원에서도 이같은 2심 판결을 인용했다.

이 민사재판의 확정판결대로라면 조 전 사장은 억울하게 감방에서 실형을 살았던 것이 된다. 재심을 신청해서라도 명예회복을 해야 할 판이다.

유죄가 인정된 가해자가 민사적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는 이같은 판결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형사소송에서 가해자의 유죄가 인정됐음에도 민사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가 배척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며 "형사책임에 요구돼야 할 엄격한 증명책임을 민사소송에서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경제범죄에서 피해자에게는 가해자를 감옥을 보내는 것보다 손해를 원활하게 배상받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며 "민사소송으로 당사자간 배상청구와 배상이 원활하도록 해주되 가해자에 대한 형사 책임은 엄격하게 물을 수 있도록 소송법 체계가 바뀔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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