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은행과 하나은행이 합병하기 한달 전인 2015년 8월. 최순실은 삼성그룹으로부터 딸 정유라의 승마훈련에 대한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당시 외환은행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법인장이던 이상화씨를 알게 됐다. 대한항공 지점장이 현지의 한국계 은행을 찾는 최씨에게 그를 소개해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이씨는 심지어 '헤드헌터'의 역할까지 했다. 최씨가 현지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직접 소개해주기도 했다. 최씨의 요청을 받고 유재경 전 미얀마 대사, 김인식 전 코이카(KOICA) 이사장 등을 인사 추천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성사는 안 됐지만 대우건설 사장 후보를 추천하기도 했다.
소위 최순실 태블릿 PC에서 발견된 이상화 당시 KEB하나은행 프랑크푸르트 법인장에게 보내는 이메일. 말 구입을 위해 계약금 5만유로를 우선 송금해달라는 내용. "3(삼성)은 결제가 며칠 걸리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신뢰가 쌓인 뒤 이씨는 최씨에게 하나은행의 독일 법인 폐쇄위기 등 본인이 처한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다. 그 무렵 하나은행은 룩셈부르크에 유럽통합법인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이씨는 하나금융그룹 회장 비서실에 통합법인을 프랑크푸르트에 두는 게 낫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별도로 보낼 정도로 적극적으로 독일에 남고 싶어 했다. 이는 최씨의 이해관계와도 일치했다. 최씨 입장에서도 독일 법인이 룩셈부르크 법인으로 통합되면 독일에서 이씨의 도움을 받기 곤란해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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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프루트 이상화 법인장의 연락처가 적혀 있던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의 수첩.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적은 안 전 수석의 메모는 이후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된다. 2015년 9월13일 박 전 대통령은 안 전 수석에게 '꼼꼼하게' 이씨의 휴대폰 번호까지 전달한다. 갑작스레 청와대 경제수석의 전화를 받게 된 이씨는 '보이스피싱'으로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구체적이었다. 하나은행의 유럽통합법인을 룩셈부르크가 아닌 프랑크푸르트에 설치하고 이씨를 통합법인장에 임명될 수 있게 하란 내용이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18.8.24/사진=뉴스1
그러나 당시 하나은행은 룩셈부르크 유럽통합법인 설립 계획을 사실상 무기한 보류한 상태였다. 이 때문에 청탁 내용도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씨를 유럽 총괄본부장 대신 '해외 업무 그룹장' 자리에 앉히라는 수정된 지시가 내려온다. 다시 안 전 수석이 정 전 부위원장에게 연락하고, 그를 통해 김 회장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반복됐다.
하지만 김 회장은 "이상화는 현재 부장급이고, 그룹장은 부행장급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인사원칙을 이유로 거절했다. 하나은행 직제에 따르면 부장과 부행장 사이엔 본부장, 상무, 전무가 있다. 부장급을 부행장급인 그룹장에 임명하는 것은 3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인사다.
그러자 안 전 수석은 정 전 부위원장을 통해 다시 실현가능한 수준인 '본부장 승진'을 요구했다. 이에 김 회장 측은 2015년 12월 하반기 정기인사에 반영해보겠다는 답변을 줬다. 하지만 하나은행은 이씨를 2016년 1월7일자로 '본부장' 대신 삼성타운 센터장(지점장)으로 발령냈다.
그러나 이 인사는 불과 한달도 안 돼 뒤집힌다. 하나은행은 그해 2월1일자로 이씨를 본부장급인 글로벌2본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청와대의 요구대로 된 셈이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최씨는 이씨가 지점장급의 삼성타운 센터장으로 발령받았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크게 실망한다. 그리곤 곧바로 박 전 대통령에게 알렸다. 이는 안 전 수석에게 대한 대통령의 추가 지시로 이어졌다.
이쯤되자 안 전 수석도 단단히 화가 났다. 중간에서 말을 전하던 정 전 부위원장도 "자꾸만 수석이 전화를 하시는 데 좀 짜증이 난다"며 김 회장에게 토로했다. '대통령 관심사항'이라는 말까지 전했다.
결국 안 전 수석이 정 전 부위원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김 회장과 통화를 하게 된다. 흥분한 안 전 수석은 통화 중 김 회장에게 면박을 주기까지 했다.
"내가 이상화를 바로 본부장으로 승진시키랬지, 언제 센터장으로 했다가 나중에 본부장 승진을 시키라고 했습니까? 당장 승진시키세요. 무조건 빨리 하세요. 지금 이거 내 이득을 위해서 합니까?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 갑니까?"
그제야 김 회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하나은행의 조직 개편을 단행한다. 글로벌사업그룹에 2개의 본부장 자리를 만들고, 일주일 뒤 이씨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김 회장은 법정에서 이씨의 본부장 승진을 인사청탁 때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부터 '조직개편'을 하려던 계획을 재검토해 본부장 두 자리를 새로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인사추천위원회를 통해 아래에서 후보가 올라왔고 본인은 추인한 것 뿐이란 얘기다. 하나은행 출신이 글로벌 영업 부문의 높은 자리에 배치되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씨 등 외환은행 출신 임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만든 자리란 해명도 곁들였다.
김인식 전 코이카 사장이 이상화 전 하나은행 글로벌 2영업 본부장 휴대전화를 통해 최순실에게 보낸 카톡내용. 최씨의 연락처를 모르는 김 전 사장이 이씨를 통해 최순실과 연락했다고 주장했다.
쟁점은 박 전 대통령이 하나은행 인사에 개입해 이씨를 하나은행 글로벌2본부장에 오르도록 한 것이 직권남용죄에 해당하는지 여부였다. 변호인들은 민간은행 부장급의 인사는 대통령 권한 밖의 일이기 때문에 직권남용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법원도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결국 민간인 최씨 뿐 아니라 공무원이었던 박 전 대통령과 안 전 수석도 하나은행 인사개입에 대해 1·2심에서 직권남용 대신 강요죄만 인정됐다.
주목할 건 김 회장이 마지막 순간 청와대의 요구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그 전까지 요구를 수차례 거절했다는 점이다. 금융지주 회장으로서 부당한 요구일지라도 대통령과 청와대 수석 뿐 아니라 은행 감독권자인 금융위 부위원장의 압력까지 뿌리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점에서다.
김정태 하나금융그룹 회장 2018.5.10 /사진=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