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 망자들의 恨 풀어주는 '부검'... 그 외로운 사명

머니투데이 최민지 기자, 이동우 기자, 이해진 기자, 김영상 기자, 최동수 기자, 방윤영 기자, 이영민 기자, 서민선 인턴기자 2018.10.19 05:30
글자크기

[부검, 외로운 사명](종합)

편집자주 의학(medicine)은 산 자를, 법의학(forensic medicine)은 죽은 자를 구한다. 망자(亡者)가 보내는 억울한 죽음의 신호를 해석하는 이들이 법의학자다. 우리나라 사망자 수는 연간 28만명 선이다. 법의학자들은 이 중 원인불명의 사망을 해부한다. 안타깝게도 부검이 필요한 시체는 늘고 있는 반면 국내 법의학자들은 수년째 40~50명 선에 그치고 있다. 법의학자를 둘러싼 편견과 오해, 처우와 현황을 알아봤다.

나는 월요일마다 시체를 보러 간다
[부검, 외로운 사명] ①어느 법의학자의 하루…유성호 서울대 교수 "편견 안타까워“

8일 서울대 의대 연구실에서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가 부검 관련 주요 업무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8일 서울대 의대 연구실에서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가 부검 관련 주요 업무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


이달 8일 오전 8시 서울 대학로 서울대 의대(연건캠퍼스) 교육관 3층. 파란 수술복과 수술용 일회용 앞치마를 갖춰 입은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46)가 2명의 어시스턴트(법의조사관)와 함께 부검실에 들어섰다.



이날 유 교수를 찾아온 검체(시신)는 모두 3구다. 유 교수는 매주 월요일 서울대병원 인근 경찰서들이 의뢰한 사인불명의 사체 3~4구를 부검한다. 일반 의사들이 하루에 일정 횟수 이상 수술을 집도하지 않듯 부검의 역시 피로도와 집중도 등을 고려해 하루 4구 이상 부검하지 않는다. 미세한 증거도 놓치지 않으려 부검은 반드시 자연광이 비치는 오전에 진행한다.

유 교수는 '꼭 사인을 밝혀드리겠다'며 시신에 마음 속으로 말을 건넨 뒤 집도를 시작했다. 첫 번째 사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사한 남성이었다. 투명 비닐과 천에 감춰졌던 사체가 모습을 드러내며 차가운 부검대에 올랐다.



부검을 하고 있는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사진제공=유성호 교수부검을 하고 있는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 /사진제공=유성호 교수
피 흘림을 방지하기 위해 유 교수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재빠르게 메스를 움직였다. 고혈압 병력이 있었던 이 남성의 경우는 심근경색이 의심됐다. 유 교수는 지름이 직경 1.5~2㎜밖에 되지 않는 관상동맥을 일일이 살핀 후 막힘 증상이 보이는 혈관 단면을 촘촘하게 잘라 동맥경화를 확인했다.

두 번째 사체는 목맴으로 숨진 여성이었다. 극단적 선택이 유력했으나 타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으므로 부검을 진행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쇄골 부위 근육을 제외하면 상처가 크지 않다. 반대로 타인이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면 목 주변 근육 상처가 크다. 약물 복용 등으로 사망 후 목맴으로 위장한 경우는 목 부위 근육 손상이 전혀 없다. 숨진 후엔 상처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 여성에게서는 타살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세 번째 사체는 물속에서 발견돼 사인이 익사로 추정됐다. 앞선 사체들과 달리 시취(시신에서 나는 냄새)가 강하고 신체 일부가 부풀어 오른 점이 특징이다. 사체가 물속에 있다가 공기 중으로 나오면 몸속 세균들이 급격히 번식하며 가스를 만들어 내고 이 때문에 안구 등 신체가 상당히 부푼다.


유 교수는 가슴을 열어 폐나 식도 등 각종 장기에 물이 찼는지 확인했다. 또 사체에 흡수된 플랑크톤을 추출하기 위해 장기 일부를 잘라뒀다. 혈관이나 장기에 얼마나 플랑크톤이 퍼졌는지를 보고도 익사 여부를 알 수 있다.

8일 서울대 의대 연구실에서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가 부검 관련 주요 업무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8일 서울대 의대 연구실에서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가 부검 관련 주요 업무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홍봉진 기자
부검은 오후 1시쯤 돼서야 끝났다. 어시스턴트들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사체를 봉합했다. 사체를 싣고 온 모 대학병원 관계자는 외부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검실로 올라와 다시 사체를 들고 나갔다. 사체는 1구 별로 병원관계자 1명이 직접 운반한다.

유 교수는 각 사체 부검이 끝날 때마다 작성해 둔 조직검사표를 어시스턴트들에게 건넸다. 조직검사는 마약분석, 유전자분석, 조직분석 등 각 항목에 따라 사체에 필요한 검사들을 간단히 표시해두는 일종의 체크리스트다.

이후 연구실에 돌아와 간단히 식사를 끝내고 본격적인 서류 작업을 시작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부검소견서 작성이다. 부검소견서는 부검 당시 확인한 사실 외에도 미리 요청해 둔 조직검사 결과, 사건 수사 내용 등을 종합해 사인을 병사·외인사·원인불상 중 하나로 결론낸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 적어도 수일이 걸리기 때문에 부검소견서 작성까지는 사체당 2~3주 정도가 필요하다.

이렇게 제출한 유 교수의 소견서는 사건 해결에 중요한 실마리다. 사법기관이 요청하면 유 교수는 감정서의 내용을 법정에서 증언하기도 한다. 쉴 틈 없는 하루에도 유 교수는 "나는 그래도 부검을 적게 하는 편"이라며 "국과수 법의관들은 이런 부검을 일주일에 2번, 즉 최대 8건의 부검을 하다 보니 사명감 없이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처럼 부검을 하는 의사는 전국에 딱 59명이다.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지는 식의 억울한 죽음을 용납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부검의 중요성은 커지지만 매년 법의학자 수는 제자리걸음이다. 2018년 기준 전국 의대 중 법의학교실에서 유 교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전공자(의사 출신)는 단 3명뿐이다.

유 교수는 "법의학자는 망자의 사인을 밝혀 정의를 구현하는 보람찬 일임에도 '사체를 해부한다'는 부정적 편견 등으로 전공자가 부족한 점이 상당히 안타깝다"고 말했다.

최민지 기자

법의학자는 CSI? 부검, 오해와 편견
[부검, 외로운 사명]②국내 부검의 총 59명, 드라마처럼 사인 '뚝딱' 나오지 않아

[MT리포트] 망자들의 恨 풀어주는 '부검'... 그 외로운 사명
'CSI 이펙트(effect·효과)'라는 말이 있다. 미국 드라마 CSI(과학수사대) 시리즈가 인기를 끌며 등장했다. 미제 사건을 부검 등 과학수사로 '뚝딱' 해결할 수 있다는 대중들의 환상을 일컫는다. 법의학자들은 드라마와 현실이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법의학자는 순식간에 사건을 해결하는 마술사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과학적 판단을 내릴 뿐이라는 것이다.

◇전국 법의학자는 고작 59명… 하루 평균 3~4구 시체 부검

대한법의학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따르면 전국 법의학자는 올해 10월 기준 총 59명이다. 국과수 소속 법의관 32명과 대학 소속 법의학자 16명, 개원의 11명이다. 치아로 연령 추정이나 개인식별을 하는 치법의학자도 6명이 있다.

부검은 보통 4명 정도가 팀을 이룬다. 집도 부검의 1명과 시체를 뒤집거나 톱으로 두개골을 여는 등 보조 역할을 맡는 법의조사관 2명, 카메라로 기록하는 사람 1명 등이다. 시체 1구를 부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내외다.

머리가 깨진 시체처럼 사인이 명확해 보이더라도 생명과 직결되는 머리, 목, 몸통은 기본으로 연다. 사소한 죽음의 정황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6년째 부검을 해온 이수경 국과수 법의관(46)은 "모든 시체의 뇌·심장·간은 1cm, 그보다 작은 신장·비장은 1cm 미만 간격으로 잘라 단면을 본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1명의 법의학자가 하루 평균 3~4구의 시체를 부검한다.

시체를 메스로 열어 보는 게 부검의 다는 아니다. 부검 전 수사 기록이나 병원진료서도 꼼꼼하게 살핀다. 이숭덕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55)는 "의학 증거에만 국한하면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며 "정황적 소견을 보면 더 충실한 해석을 할 수 있고, 수사 자료를 보면 해석 범위도 폭넓어진다"고 말했다.

문서 작업도 빼놓을 수 없다. 이수경 법의관은 "아침 8시에 출근해 오전 내 부검 한 뒤 퇴근 전까지 감정서 작성에 매달린다"고 말했다. 며칠 혹은 일주일 전 부검한 시체들의 부검서다. 당일 오전 부검한 시체는 혈액과 장기조직을 정밀검사 해야 하기 때문에 곧바로 작성할 수 없다. 부검감정서 작성까지는 시체 1구당 대략 2~3주가 걸린다.

[MT리포트] 망자들의 恨 풀어주는 '부검'... 그 외로운 사명
◇"살인사건 사체만 부검하는 것 아냐…내인사 41%"

범죄에 휘말린 시체만 부검한다는 것도 오해다. 국과수에 따르면 2016년 국내에서 부검이 이뤄진 사망자는 총 8335명이었다. 이 중 외인사(사고·타살 등 신체 외적인 원인)가 48.3%, 내인사(질병 등 신체 내적인 원인) 41.4%로 나타난다. 외인사 중 사고사가 1584명(39.3%)으로 가장 많고, 자살 1378명(34.2%), 타살 428명(10.6%) 순이다.

부검을 해도 모든 사인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시체가 심하게 부패하거나 백골화된 경우 사인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 2016년 국내에서 부검한 사망자 중 약 13%인 987명은 끝내 사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이숭덕 교수는 "법의학은 의학과 법학을 결합해 의미 있는 결과를 내는 것"이라며 "꼭 사망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도 그 외 의미있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법의학자들은 꼭 유족 동의가 없더라도 의문스러운 죽음이라면 부검이 필수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법의학에서는 사망자 중 통상 15%가량을 사인불명 변사로 본다. 그러나 연간 약 3만건 변사 가운데 부검이 이뤄지는 7000~8000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2만건 이상은 끝내 죽음의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다.

◇"부검, 산 자도 구한다… 보건·안전 대책 마련에 도움"

우리나라는 몸에 손대는걸 꺼려 하는 과거 문화 때문에 "죽은 사람을 두 번 죽일 작정이냐"며 부검에 반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일본은 병원에서 치료받다 사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검을 한다. 범죄 가능성이 없더라도 사인 파악이 안되면 '행정부검'을, 범죄 가능성이 의심 되면 '사법부검'을 한다.

이숭덕 교수는 "억울한 죽음이 나오지 않도록 국가가 가능성 있는 것은 다 조사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문제는 그 결정을 자의적으로 한다는 것"이라며 "부검을 하는 기준을 국가가 정해야 하고 기준에 맞지 않아 부검을 하지 않는다면 최종적으로 누가 결정할지 등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검은 망자뿐만 아니라 산자를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수경 법의관은 "사인이 명확한 병사라도 부검해서 얼마나, 어떻게 병을 앓았는지 통계를 만들면 우리 국민에게 적합한 보건정책을 쓸 수 있다"며 "화재 사건 시신도 부검하면 상흔들로부터 해당 건물이 부실하게 지어지진 않았는지 등 정보를 얻어 안전대책을 만드는 데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동우 기자, 이해진 기자, 김영상 기자

억울한 망자, 마지막 희망 '부검’
[부검, 외로운 사명]③부검 시작과 끝…의뢰건수 2년만에 3000건 가까이 늘어

[MT리포트] 망자들의 恨 풀어주는 '부검'... 그 외로운 사명
죽은 자는 자신의 몸에 남겨진 단서로 메시지를 남긴다. 하지만 망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해석하고 진실을 밝혀내기까지는 복잡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경찰의 현장 검시가 그 시작이다.

◇사망원인 불분명할 때 부검…검시로 부검 신청 결정

사체 부검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첫 번째 절차는 경찰의 검시다. 검시는 변사체나 변사의 의심이 있는 사체를 조사해 범죄 연루 가능성을 판단하는 절차다.

검시는 시신이 발견된 담당 경찰서 소속 형사와 검시 전문요원인 검시조사관(경찰청 소속), 의사 등이 진행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 구로구 빌라에서 변사체가 발견되면 담당 경찰서인 구로경찰서 형사과 당직 형사 2명, 검시조사관 2명, 의사 1명 등이 파견되는 식이다.

부검이 이뤄지는 대상은 변사체다. 변사체는 사망의 원인을 단정할 수 없고 조사해 보지 않으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시신을 의미한다. 이를 판단할 때 검시조사관과 의사의 역할이 크다. 검시조사관은 간호사, 임상병리사 자격증 소지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경찰청 특채로 선발된다. 현재 전국에 144명이 있고 서울에 19명이 배치돼 있다.

부검이 필요한 사체는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나 대학병원에 부검을 의뢰한 건수는 2015년 6338건에서 지난해 9164건으로 2년 만에 3000건 가까이 늘었다. 올해는 1월부터 9월까지만 벌써 7534건을 의뢰했다.

◇부검도 압수수색 영장 발부… "변사자는 대부분 부검"

변사자라고 바로 부검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부검이 진행되려면 경찰이 검찰에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하고 검찰이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청구해 발부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만약 법원이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하면 강제성을 띄기 때문에 가족들이 반대하더라도 부검은 집행된다.

사인은 불명확하더라도 타살 흔적이 없거나 자연사 정황이 확실하면 부검까지 가지 않고 현장 검시만 이뤄지기도 한다.

서울 일선 경찰서 한 형사팀장은 "변사체를 발견했을 때 사망원인이 뚜렷하지 않으면 부검을 고려한다"며 "현장 검시 결과 부검이 필요 없다는 판단이 서더라도 가족들이 원하면 대부분 진행한다"고 말했다.

사체는 시신을 보관한 병원 관계자가 구급차로 부검실까지 운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투명 비닐에 싼 후 천으로 가린 채 구급차에 옮긴다.

◇부검 후 유가족에게 인도…"지자체로 넘어오는 시신 10명 중 9명 가족도 못 만나"

부검을 마친 시신은 가족이 찾아가는 시신과 그렇지 않은 시신 둘로 나뉜다. 가족이 외면하거나 아예 가족이 없는 무연고 시신은 병원 장례식장 안치실에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지방자치단체로 넘겨진다.

부검이 끝날 때까지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경찰은 담당 시·군·구청 등 지자체에 시신 인계 공문과 부검소견서를 함께 보낸다. 이때부터 지자체는 2주 동안 가족을 찾는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어 보고 연고자가 확인되면 등기우편으로 시신 인수 요청공문을 보내는 등 연락한다.

2주 동안 가족을 찾지 못하거나 가족이 시신 인수를 거절하면 장례 절차를 시작한다. 기존에는 장례 없이 화장하는 '직장(直葬)'으로 처리됐지만 서울시가 올해 5월부터 지자체 중 처음으로 공영장례식을 도입했다.

최근엔 고독사로 지자체가 처리하는 장례가 느는 추세다. 서울특별시청 복지본부 어르신기획과에 따르면 가족 없이 화장 등을 실시하는 건수는 2012년 249건에서 지난해 366건으로 늘었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180건의 장례를 치렀다.

서울 영등포구청 관계자는 "경찰에서 받은 시신 10명 중 9명은 가족을 찾아도 가족들이 연락을 받지 않거나 시신 인수를 거절한다"며 "부검을 한 시신은 대부분 사연들이 많은데 가족들이 얼굴도 모른다, 돈이 없다며 외면할 때는 안타깝다"고 말했다.

화장과 장례가 끝나면 유골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상 '무연고 시신 등의 처리 공고' 조항에 따라 10년간 보관된다. 이때 지자체는 일간신문에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는 공고를 내야 한다. 만약 10년이 지나도 가족이 나타나지 않으면 유골은 자연에 뿌려진다.

최동수 기자

법의학자, 사건을 뒤집다…'시신의 증언’
[부검, 외로운 사명]④1987년 박종철 열사부터 여고생 살해 장기 미제 사건까지

'드들강 여고생 살인 사건' 피해자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지난해 1월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참석한 뒤 법정을 나서는 모습 /사진=뉴스1'드들강 여고생 살인 사건' 피해자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지난해 1월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참석한 뒤 법정을 나서는 모습 /사진=뉴스1
2001년 2월 전남 나주 드들강 인근에서 17살 여고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에게서 목을 졸려 살해된 흔적이 발견됐다. 하지만 용의자를 찾지 못했다.

10년 넘게 해결하지 못했던 이 사건은 2012년 8월 여고생에게서 발견된 정액과 DNA(유전자정보)가 일치하는 피의자 김모씨(41)를 찾아내면서 실마리를 찾았다. 하지만 검찰은 김씨를 기소하지 못했다. 김씨는 "여고생과 성관계를 한 것은 맞지만 강간이나 살인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지만 법의학자의 분석 이후 완전히 뒤바뀌었다. 원로 법의학자인 이정빈 가천대 법의학과 석좌교수(72)는 피해자가 성관계 직후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피해자 질내에서 생리혈과 정액이 섞이지 않은 상태로 검출된 점을 의아하게 봤다. 정상적으로 성관계를 맺은 직후 여고생이 신체를 움직이는 등 활동을 했을 경우 생리혈과 정액은 빠른 속도로 섞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직접 혈액과 정액으로 실험도 해봤다. 정액과 혈액이 담긴 봉투를 살살 흔들자 금방 섞였다. 피해자 양쪽 손목과 가슴 등에 상처는 방어흔으로 분석돼 성폭행 가능성이 짙었다. 이 교수는 "성폭행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결론냈다.

결국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피고인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드들강 사건처럼 법의학자들이 진실을 밝히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건은 수없이 많다.

91세 노모 성폭행 살인 사건에서도 아들인 피의자 강모씨(53)는 "피해자를 살해 후 시체를 오욕했을 뿐 살해하기 전 추행한 사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2016년 1월 강씨가 모친인 피해자를 수차례 폭행·성폭행한 뒤 목을 졸라 사망하게 한 일이다.

경찰은 강씨에게 존속살인죄와 사체오욕죄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유성호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는 "살아 있을 당시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분석했다.

우선 피해자의 목과 얼굴, 팔다리, 음부 등에 많은 상처가 발견됐다. 특히 음부 상처는 정도와 출혈량을 봤을 때 살아 있을 당시 생긴 것으로 분석했다. 사체의 경우 상처가 생기면 생전에 비해 훨씬 적은 혈액만 나오기 때문이다. 또 혈액이 응고되지 않고 상처가 벌어지는 정도도 덜하다.

검찰은 강씨에게 강간 살인죄를 적용해 기소했고 서울고법은 2016년 강씨에게 원심과 같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아내가 남편의 재산을 노리고 다량의 니코틴을 주입해 살해한 일명 '니코틴 살해' 사건도 자살로 위장될 뻔했으나 법의학자의 부검이 이를 뒤바꿨다.

'니코틴 살해'는 2016년 4월 송모씨(49·여)가 내연남 황모씨(48)와 짜고 경기 남양주 자택에서 남편에게 니코틴 원액을 주입해 살해한 사건이다.

피고인들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내연남 황씨가 인터넷으로 니코틴 원액을 구입한 사실 외에 직접 살해 증거가 없었다. 피해자인 남편에게서 니코틴 성분과 함께 수면제가 발견돼 자살 정황도 있었다.

하지만 사체를 부검한 이정빈 교수는 자살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니코틴 중독이 사인이라는 분석이다. 피해자 몸에서는 수면제(졸피뎀)가 리터당 0.41mg 검출됐다. 이 정도는 깊은 잠에 빠져들거나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인데 스스로 니코틴을 투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냈다.

검찰은 법의학 자문 등 과학수사기법으로 피고인들이 혼인신고 단계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살인 사건임을 밝혀냈다. 송씨와 황씨는 올해 7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숨진 당시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 당시 경찰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지만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뉴스1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숨진 당시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 당시 경찰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지만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뉴스1
부검은 강력 사건의 진위는 물론 역사적 분수령도 세웠다.

1987년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담당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1과장 황적준 박사(고려대 법의학교실 명예교수)는 경찰의 압박에도 '흉부압박에 의한 질식사'가 사인이라고 밝힌 부검감정서를 작성했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두고 "병사가 아닌 머리 손상으로 인한 외인사"라고 발언한 이 역시 이윤성 전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였다.

방윤영 기자

연봉 6000만원대 의사 '법의관'…"전공자 딱 3명“
[부검, 외로운 사명]⑤일반 의사 비해 처우 턱없이 낮아…"사회적 의미, 제도로 보여줘야“

[MT리포트] 망자들의 恨 풀어주는 '부검'... 그 외로운 사명
김문영씨(34)는 현재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의 유일한 의사자격증 소지 전공생이다. 학위를 따더라도 부검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학생은 김씨 뿐이란 뜻이다.

김씨는 일반 대학에 다니다가 부검의가 되기 위해 의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김씨 같은 사례는 의대생 사이에서 극히 드물다. 현재 전국에서 부검의가 될 수 있는 의사 출신 법의학 전공생은 단 3명(고려대·서울대·전남대 각 1명)뿐이다.

법의학이 의대생들에게 외면받는 이유는 노력에 비해 얻는 성과가 적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검의가 되려면 4년간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다시 법의학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아야 한다.

법의학 전공자들의 진로는 크게 두 가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법의관이 되거나 법의학 교수가 되는 길이다. 교수가 될 수 있는 자리도 많지 않다. 전국 41개 의대 중 법의학 교실이 있는 곳은 10곳, 법의학 교수는 16명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가톨릭대와 건국대는 최근 유일한 법의학 교수가 은퇴하면서 병리학 교수가 겸임하는 방식으로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예비 부검의가 적다 보니 국과수는 매년 구인난을 겪는다. 국과수 법의관 정원은 53명이지만 21석이 비어있다. 국과수는 지난해 3차례 법의관 채용을 진행했지만 지원자 수는 모두 3명에 불과했다. 올해 한 차례 진행한 채용에도 공고 인원의 25%인 4명만 지원했다.

[MT리포트] 망자들의 恨 풀어주는 '부검'... 그 외로운 사명
인력 부족은 열악한 근무여건으로 이어진다. 국과수에 따르면 국내 부검의(대학 소속 법의학자+국과수 소속 법의관) 1인당 1년에 160구 정도의 시체를 부검한다. 2016년 기준 국과수 법의관 1명당 책임지는 국민의 수는 147만명으로 미국 40만명, 일본 80만명과 비교해 볼 때 업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6년째 부검을 해온 이수경 국과수 법의관(46)은 "사람이 부족하니 법의관 1명당 부검 수가 많아서 과로하게 된다. 주말에 나와서 일해도 금전적인 보상이 없고 일이 쌓여있어서 휴가를 못 가는 사람들도 많다"며 "업무량이 많으니 새로운 인력이 들어오지 않는 악순환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법의학자들은 부검의가 부족하면 억울한 죽음이 묻힐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숭덕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55)는 "90년대에는 부검의가 부족해서 경찰이나 검찰이 인위적으로 부검 건수를 제한한 적이 있다"며 "인력이 부족하면 죽음의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는데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검의들은 근무량이 많은 가운데 정확한 검시를 위해 고군분투한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원인불명 사망률은 10.1%, 65세 미만은 5.2% 수준으로 세계보건기구(WHO) 권고율(각각 10%, 5%)을 겨우 맞추고 있다.

전문가들은 처우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법의학계에 따르면 국과수 법의관의 연봉은 경력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6000만~6500만원 정도다.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전국 의사 평균 연봉인 1억5600만원(2017년 기준)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법의관에게 권한이 적은 현행 제도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우리나라는 변사체를 조사하는 검시 집행은 경찰, 검시 집행 책임자는 검사, 부검 여부 결정자는 판사, 실무는 법의관이 하는 복잡한 구조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은 검시의 모든 과정을 법의관이 담당한다.

이숭덕 교수는 "처우 개선도 중요하지만 법의학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제도로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민 기자, 김영상 기자, 서민선 인턴기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