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법의학자, 사건을 뒤집다…'시신의 증언'

머니투데이 방윤영 기자 2018.10.19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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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 외로운 사명④]1987년 박종철 열사부터 여고생 살해 장기 미제 사건까지

편집자주 의학(medicine)은 산 자를, 법의학(forensic medicine)은 죽은 자를 구한다. 망자(亡者)가 보내는 억울한 죽음의 신호를 해석하는 이들이 법의학자다. 우리나라 사망자 수는 연간 28만명 선이다. 법의학자들은 이 중 원인불명의 사망을 해부한다. 안타깝게도 부검이 필요한 시체는 늘고 있는 반면 국내 법의학자들은 수년째 40~50명 선에 그치고 있다. 법의학자를 둘러싼 편견과 오해, 처우와 현황을 알아봤다.

'드들강 여고생 살인 사건' 피해자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지난해 1월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참석한 뒤 법정을 나서는 모습 /진=뉴스1'드들강 여고생 살인 사건' 피해자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지난해 1월 광주 동구 광주지법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참석한 뒤 법정을 나서는 모습 /진=뉴스1


2001년 2월 전남 나주 드들강 인근에서 17살 여고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에게서 목을 졸려 살해된 흔적이 발견됐다. 하지만 용의자를 찾지 못했다.



10년 넘게 해결하지 못했던 이 사건은 2012년 8월 여고생에게서 발견된 정액과 DNA(유전자정보)가 일치하는 피의자 김모씨(41)를 찾아내면서 실마리를 찾았다. 하지만 검찰은 김씨를 기소하지 못했다. 김씨는 "여고생과 성관계를 한 것은 맞지만 강간이나 살인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지만 법의학자의 분석 이후 완전히 뒤바뀌었다. 원로 법의학자인 이정빈 가천대 법의학과 석좌교수(72)는 피해자가 성관계 직후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피해자 질내에서 생리혈과 정액이 섞이지 않은 상태로 검출된 점을 의아하게 봤다. 정상적으로 성관계를 맺은 직후 여고생이 신체를 움직이는 등 활동을 했을 경우 생리혈과 정액은 빠른 속도로 섞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직접 혈액과 정액으로 실험도 해봤다. 정액과 혈액이 담긴 봉투를 살살 흔들자 금방 섞였다. 피해자 양쪽 손목과 가슴 등에 상처는 방어흔으로 분석돼 성폭행 가능성이 짙었다. 이 교수는 "성폭행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결론냈다.

결국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피고인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드들강 사건처럼 법의학자들이 진실을 밝히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건은 수없이 많다.

91세 노모 성폭행 살인 사건에서도 아들인 피의자 강모씨(53)는 "피해자를 살해 후 시체를 오욕했을 뿐 살해하기 전 추행한 사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2016년 1월 강씨가 모친인 피해자를 수차례 폭행·성폭행한 뒤 목을 졸라 사망하게 한 일이다.

경찰은 강씨에게 존속살인죄와 사체오욕죄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유성호 서울대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교수는 "살아 있을 당시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분석했다.

우선 피해자의 목과 얼굴, 팔다리, 음부 등에 많은 상처가 발견됐다. 특히 음부 상처는 정도와 출혈량을 봤을 때 살아 있을 당시 생긴 것으로 분석했다. 사체의 경우 상처가 생기면 생전에 비해 훨씬 적은 혈액만 나오기 때문이다. 또 혈액이 응고되지 않고 상처가 벌어지는 정도도 덜하다.

검찰은 강씨에게 강간 살인죄를 적용해 기소했고 서울고법은 2016년 강씨에게 원심과 같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아내가 남편의 재산을 노리고 다량의 니코틴을 주입해 살해한 일명 '니코틴 살해' 사건도 자살로 위장될 뻔했으나 법의학자의 부검이 이를 뒤바꿨다.

'니코틴 살해'는 2016년 4월 송모씨(49·여)가 내연남 황모씨(48)와 짜고 경기 남양주 자택에서 남편에게 니코틴 원액을 주입해 살해한 사건이다.

피고인들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내연남 황씨가 인터넷으로 니코틴 원액을 구입한 사실 외에 직접 살해 증거가 없었다. 피해자인 남편에게서 니코틴 성분과 함께 수면제가 발견돼 자살 정황도 있었다.

하지만 사체를 부검한 이정빈 교수는 자살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니코틴 중독이 사인이라는 분석이다. 피해자 몸에서는 수면제(졸피뎀)가 리터당 0.41mg 검출됐다. 이 정도는 깊은 잠에 빠져들거나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인데 스스로 니코틴을 투여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냈다.

검찰은 법의학 자문 등 과학수사기법으로 피고인들이 혼인신고 단계부터 치밀하게 계획한 살인 사건임을 밝혀냈다. 송씨와 황씨는 올해 7월 열린 항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숨진 당시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 당시 경찰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지만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뉴스1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고문으로 숨진 당시 서울대생 박종철 열사. 당시 경찰은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지만 물고문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뉴스1
부검은 강력 사건의 진위는 물론 역사적 분수령도 세웠다.

1987년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의 부검을 담당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1과장 황적준 박사(고려대 법의학교실 명예교수)는 경찰의 압박에도 '흉부압박에 의한 질식사'가 사인이라고 밝힌 부검감정서를 작성했다.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두고 "병사가 아닌 머리 손상으로 인한 외인사"라고 발언한 이 역시 이윤성 전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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