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지만 열일곱입니다…4·16 합창단 '차웅이'의 하루

뉴스1 제공 2018.09.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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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이름으로 사는 세월호 부모들
아들 사진 보며 "엄마 오늘 또 시작할게"

= [편집자주] 추석을 맞아 모두가 고향으로 가족들을 만나러 갑니다. “엄마 나 왔어.”“아버지, 우리들 왔어요.” 골목마다, 집집마다 이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더는 이 말을 듣지 못해 사무치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대부분은 딸과 아들의 빈자리를 차마 볼 수가 없어 이제 명절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습니다. 뉴스1은 명절을 앞둔 단원고 2학년4반 차웅이 엄마 김연실 씨의 하루를 내러티브 저널리즘 기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관찰과 묘사, 스토리텔링, 인물 중심 서술 등의 문학적인 장치를 이용해 더 생생하게 진실을 드러내는 기사 쓰기 방식을 말합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대회에서 노래하는 4·16합창단© News1가습기살균제피해자대회에서 노래하는 4·16합창단© News1


“아이들 얘기하는 게 제일 신나고 재밌어요. 유치원 보내놓고 엄마들 수다 떠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 힘든 적도 있지만…. 우리가 슬퍼하고만 있거나 처져있지 않아요.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2학년 4반 ‘차웅이’가 이렇게 말했다. 약 4년 5개월전 한꺼번에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은 자신의 이름 대신 서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차웅이는 세월호 침몰사고 때 자신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주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던 아이다.



세월호 희생자 고 정차웅 군 © News1세월호 희생자 고 정차웅 군 © News1
차웅이는 꽃을 말려서 책갈피를 만들거나 아이들의 사진과 말린꽃, 부모님의 편지를 액자에 담아 아이들의 생일날 가족들에게 선물하는 ‘꽃마중’이라는 동아리 회원이다. 지숙이와 큰 건우, 다인이도 차웅이와 함께 말린꽃을 넣은 책갈피를 만들기 위해 아침부터 안산온마음센터에 모였다. 하지만 일의 시작은 속을 든든히 채우는 것부터 시작됐다. 센터가 있는 건물을 빙 돌아 1인분에 6000원짜리 백반집에 들어가 보리밥과 쌀밥을 반반 섞은 밥으로 주문했다.

지숙이와 다인이는 서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난리다. 하지만 양푼에 담긴 밥과 반찬이 테이블에 깔리자 일순간 조용해지면서 흐뭇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둘은 “밥만 봐도 눈이 휙 돌아가는데 이러고도 살을 빼?” “맛있다. 너무 좋아, 우잉~”하며 웃었다.

다인이가 얼마전 사놓은 양파가 너무 많다고 말하자 자연스럽게 서로 몇 개씩 나눠 갖는 것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립밤이나 핸드크림을 나눠 바르던 소녀들은 이제 양파를 나눠 먹는다. 차웅이는 꽃마중회원이자 4·16합창단 단원이기도 하다. 이 모임 후 오후에는 국회의사당에서 열리는 가습기살균제피해자대회 추모대회에서 노래를 부를 예정이다.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의 동아리 '꽃마중'의 작품© News1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의 동아리 '꽃마중'의 작품© News1
지난해 말 성균관대 외상심리건강연구소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유족들은 사고 후 수년간 모두 극심한 스트레스로 치과 질환 문제를 겪어 대부분이 잇몸이 약해져 치아가 흔들리거나 저절로 빠지는 증상을 경험했다. 췌장염, 집중력 저하, 불면증 등도 겪었으며 일부는 불면증을 해소하려 자주 술을 마시는 등 알코올 의존 의심 증상도 보였다.

세월호특별법에 따라 유족들의 심리치료를 위해 설치된 안산온마음센터는 9월말에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동안 치료받은 세월호 가족 330명에 대한 실태조사를 내놓을 예정이다.

김선식 안산온마음센터 상임팀장은 “유족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다”면서도 “그 트라우마는 극복 가능한 것이 아니다. 단지 몸과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게 체력을 길러가는 과정일뿐”이라고 설명했다. “세월호는 일반적인 재난과 다른 부분이 있어요. 일반적 트라우마는 ‘왜’에 대한 답을 듣고 애도에 들어가는데 세월호는 그 답이 아직 나오지 않은 거라 죽음의 원인에 대한 질문과 애도가 같이 진행되고 있어요.” 그리고 ‘왜 죽었는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질문은 죽을 때까지 가족의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오후에 국회의사당 헌정기념관의 무대와 바로 연결된 대기실에는 노란 티셔츠를 입은 4·16합창단 단원들이 무대에 오를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란 옷에는 '그리움, 별이 되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시찬이는 아픔이 좀 치유가 되었느냐고 묻자 아직 치유는 어림없다면서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억울함과 분노는 아직 그대로예요. 시간도 많이 지났고 특조위 조사 그런게 진행되니 뭔가 밝혀지고 이뤄지고 있다 생각하지만 당사자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진상규명, 처벌, 안전사회 구축 뭐든 전혀 나아진 게 없어요. 세월호는 아직 그대로라고 분명히 기사에 써 줘요. 알았죠?”

시찬이는 울지 않으려고 이를 너무 깨물어 성한 어금니가 별로 없다. 아버지인 자신이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4년 이후 끓어오르는 분노 때문에 이를 세게 악무는 습관이 생겨 이가 많이 상했는데 최근에 기무사 문건 발견 뉴스를 보다가 또 어금니가 깨졌다. 가끔은 아이가 보고 싶을 때 무장해제되듯 구석에서 혼자 운다. 하지만 실컷 울어도 시원해지진 않는다.

스태프의 손짓에 따라 대기실과 연결된 무대로 올라간 합창단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과 ‘우리 큰 걸음으로’ 두 곡을 불렀다. ‘우리 큰 걸음으로’ 중간에 시찬이가 나레이션을 위해 옆으로 나와 “세월호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한 어른들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고 말했다. 그순간 단원 중 한 명이 눈을 꾹 감았다. 나머지 몇 명도 앙다문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2014년 4월16일 참사 이후 유가족들은 자주 모여서 노래를 했다. 평화의나무합창단과 장로회신학대 학생 몇이 복받침에 무너지는 유족들의 목소리를 떠받쳤다.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500일을 추모하는 공연을 한 뒤 4·16가족합창단이라는 이름으로 아예 합창단을 꾸렸다. 유족 20여명과 시민 10여명이 같이 매주 월요일에 모여 연습한다. 공연은 시간이 되는 이들이 간다.

“초반에 유족들은 아주 많이 울었어요. 지금도 가끔 우십니다. ‘우리는 너의 엄마다. 우리는 너의 아빠다. 잊지 않을게’라는 가사나 ‘서쪽 하늘에 있나. 어느 별이 되었을까’ 이런 가사를 부를 때요.” 평화의나무합창단 단원으로서 416합창단에 합류한 한 시민이 말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대회에서 노래하는 4·16합창단 모습. 제일 오른쪽이 고 정차웅 군 어머니 김연실 씨다. © News1가습기살균제피해자대회에서 노래하는 4·16합창단 모습. 제일 오른쪽이 고 정차웅 군 어머니 김연실 씨다. © News1
노래공연을 마치고 안산으로 돌아가는 4·16합창단 © News1노래공연을 마치고 안산으로 돌아가는 4·16합창단 © News1
“아까 지나간 앰뷸런스에 노란 리본이 붙어 있었어.” “이 차도 노란 리본을 붙였닷!”

노래 공연을 마치고 국회의사당에서 안산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차웅이가 기쁜 듯 창밖을 보며 잇따라 외쳤다. 제훈은 묵상집을 읽으며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제훈은 “제일 친한 친구가 누구냐”는 엄마의 질문에 “친구는 순위를 정하면 안 된다”고 말했던 의젓한 남학생이다. 수녀님이 읽으라고 권해서 두 권 째 읽고 있던 묵상집을 덮으며 제훈은 “우리는 할머니 할아버지 돼서까지 이렇게 노래하러 다닐건가. 참 막연하고 막막하다”고 말했다. 언제까지 이 싸움을 해야할지 다들 알 수 없어 힘이 좀 빠진 듯했다. 운전을 하던 시찬이는 “사람들이 우리 노래를 듣고 힘내는 것을 보면 계속해야 할 거 같은데”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사망신고를 대부분 하지 않았다. 어떤 부모는 본인이 살아있을 때까지 평생 안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남학생들은 징병검사 통지서가, 여학생들은 자궁암 국가검진 통지서가 집집마다 배달됐다. 아이 방을 그대로 두고 있는 부모님도 많다. 하지만 처음에는 아이 책상에 가서 자주 앉아 있곤 했는데 몇 년이 지나니 시간 감각이 없어지고 그 횟수도 줄었다.

두 시간 넘게 걸려 안산으로 돌아온 유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차웅이는 안산에 대어놓은 자신의 차를 타고 시흥으로 돌아갔다. 2012년 시흥에 분양받은 아파트를 2014년 여름에 아이 없이 들어왔다. 1년반 동안 마음은 ‘다시 안산으로 돌아가야 한다’와 ‘아니다, 시흥에 살아야겠다’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하지만 늘 안산으로 건너가 아이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들과 어울린다. 그래선지 지금도 아이가 여행간 거 같다.

차 백미러에는 아이의 사진이 걸려 있다. 차에 타면서 ‘엄마 오늘 또 시작한다’ 이렇게 중얼거린다고 했다. 하지만 잠시 숨을 들이마시더니 차웅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사진을 잘 못봐요. 눈이 마주치면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 같아서요.”

누구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줬는지 참사가 난 16일 들었는데 경황이 없어 잊었다. 살아난 아이가 부담될까봐 이젠 알려고 하지 않는다. 차웅이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그 아이가 살아있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차웅이는 세월호 희생자 중 제일 먼저 발견되었다. 자율복을 입고 있던 차웅이가 먼저, 제복을 입고 있어 바로 신원이 확인된 박지영 승무원이 그 다음으로 발견됐다.

차웅이는 찰나의 시간이 부족해 살지 못했다. 발견 당시 사망이 아닌 의식불명 상태였는데 심폐소생해서 맥이 약간 돌아와 다들 학생 하나를 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병원으로 가는 동안 상태가 악화됐다. 병원에 도착 후 가망이 없었지만 한명이라도 살리려는 마음으로 의사들이 20분간 심폐소생술을 했다.

마음 아픈 이야기지만 이것조차 차웅이와의 소중한 추억이다. 단원고 아이들에겐 옛 추억만 있을 뿐 더 이상 새로운 추억이 생기지 않는다. 어머니들은 추억만 갖고 얘기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추억은 희미해진다. 그래서일까. 어머니들이, 아버지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받아 17세처럼 살고 있는 것은. 그것도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모습으로.

“아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해서 지난 4주기 때 이렇게 말했어요. ‘차웅아, 이제 우리가 갈게 기다려줘. 우리 마중나올 거지?’” 그 전에 가족은 항상 “그곳에서 잘 있니?” 하고 안부를 물었었다. 하지만 이 말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아이를 보낸 것을 조금 인정한 거 같다고 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차웅이의 눈자위가 불그스름해졌다. 차웅이는 이사온 집에 꾸며놓은 아이 방문에 기대어 “우리는 이제 아이에게 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고 정차웅 군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품들© News1고 정차웅 군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품들© News1
주인을 잃은 고 정차웅 군의 방© News1주인을 잃은 고 정차웅 군의 방© New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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