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이후 첫 추석 "시댁 안 간다" 며느리들 선언

머니투데이 이동우 기자, 이해진 기자 2018.09.2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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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거부하는 목소리 커져…전문가 "새로운 문화 만들어가야 할 시대"

임종철 디자인기자임종철 디자인기자


결혼 4년차 회사원 박모씨(37)는 이번 추석을 어떻게 넘겨야 할지 고민이다. 아내가 시댁이 아닌 친정에서 명절을 보내겠다고 선언하면서다. 박씨와 그의 아내는 최근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고, 이 과정에서 아내가 매년 시댁과 처가를 번갈아 가자고 제안했다.



평소 아내의 생각에 동의해 온 박씨는 자신부터 남성 중심의 명절 문화를 바꾸자고 생각했으나 막상 실천할 때가 되니 답답한 상황이다. 혼자 고향에 나타난 이유를 묻는 어머니께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가 막막하다.

'미투'(Me 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으로 촉발된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존 남성 중심의 명절에서 벗어나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



22일부터 시작되는 이번 추석 연휴는 올해 초 미투 운동으로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맞는 명절이다. 올해 1월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시작된 국내 미투 운동은 사회 전반에서 여성 인권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여전히 많은 여성은 추석 등 명절 문화에 가부장적 요소가 상당하다고 지적한다. 명절이 여성에게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요인으로는 '시댁만 가거나 우선하는 관행', '차례상 준비에 남성은 도와주지 않는 행태' 등이 꼽힌다.

올 초 취업포털 사람인이 기혼남녀 약 500명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서도 '시댁 먼저 가고 처가를 가는 관행'에 '불합리하다'고 답한 여성은 55%에 달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이번 추석 시댁을 방문하지 않는 등 가부장적 명절 문화에 저항하는 여성들도 나타난다. 올해로 결혼 3년 차인 정모씨(32)는 친정을 먼저 들러 시댁에 가는 것으로 정했다. 정씨는 "매년 시댁만 먼저 가니 정작 친정에는 반나절도 앉아 있기가 힘든 상황이 자꾸 벌어진다"며 "이런 차별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을 바꿔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웹툰 작가 이모씨(30)도 이달 24일 시댁에 가지 않는 아내들과 함께하는 '제사 가지 말고 놀자' 모임을 기획하고 있다. 이씨는 "개인적으로 어머니가 명절에 분노하는 것을 보며 자랐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게 됐다"며 "거창하게 여권 신장까지 갈 것도 없이 개인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씨는 "명절에 혼자 집에 있으면 가부장제에 더 화가 나기도 해서 여럿이 모여 먹고 떠들면 명절 기분을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모임을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명절의 가부장적 요소를 개선해 나가는 노력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안상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평등문화교육연구센터장은 "명절에 시댁을 안 가는 것을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며 "여성의 요구가 과거보다 부당하거나 도전적인 요구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먼저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던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 센터장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야 할 시대"라며 "남녀가 함께 하는 명절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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