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경 제8대 한국여성경제인협회장
평양 거리는 차분한 일상처럼 보였다. 단고기(개고기)집 간판도 보였다. 잡화점이나 상점은 불투명 유리로 돼 있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쇼윈도를 활용한 상점은 거의 없었다. 상점을 드나드는 손님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선전용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은 안들었지만 대북경제제재로 상품이 별로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의 구매력이 못 받쳐준 이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북한이 자랑하는 '목란관'에서 성대한 환영 만찬이 시작됐다. 이후로도 그랬지만 테이블에선 주로 음식 이야기를 많이 했다. 식사에서 나의 입을 사로잡은 것은 '강정합성 배속김치'였다. 배의 속을 파서 백김치를 넣고 숙성시킨 듯 했다. 다른 김치도 참 맛있었다. 물기 있는 김치가 맵지 않고 담백했다.
특이했던 것은 남쪽에서 주로 후식으로 나오는 떡이 에피타이져로 나왔다는 점이다. 떡을 먹고 속을 좀 달래라는 의미라고 생각했다. 후식은 과일과 아이스크림, 오미자차 등이 나왔다. 아이스크림조차 우리보다 덜 달았다. 그러고 보니 모든 음식에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듯 하나같이 자극적이지 않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식사 자리는 북한측 인사 한 명이 항상 동석했다. 직책이나 소속 얘기는 피했다. 그냥 "당에 있시요"라고 했다. 다소 딱딱했던 분위기는 자녀 이야기로 풀렸다. "딸 둘이 있다"고 답한 이 참석자는 내가 "북한은 남아선호사상이 강한데 섭섭하자 않냐"고 했더니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우리측 인사가 "아들 둘 있는데, 나 포함 세 남자가 한 여자를 받들고 산다"고 했고, 이 참석자도 "우리도 아내 눈치를 많이 살핀다"고 말하면서 화기애애해졌다.
누구에게나 각별히 대했다. 나에게도 그랬다. 현 단장에게 내 소개를 할 때 "내가 한국 여성경제인 '대빵'이다"고 우스갯 소개를 했더니 의미를 묻고나서 나를 볼 때마다 '대빵님'이라고 불렀다. 방북 둘째날 헤어질 때 "남한에서 꼭 뵙자"고 했더니 "그럼요. 우리 대빵님 만나야지"라고 약속했다.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리는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숙소인 고려호텔에 머물렀다. 1인1실이었고 별도로 수행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정이 끝나면 TV를 봤다. 궁금했던 북한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측 뉴스만 채널에 잡혔다. 현장에 있어서 몰랐던 이야기는 여기서 접했다. 고려호텔은 최근 리모델링을 해서인지 북한이 자랑할만큼 훌륭했다. 우리로 치면 롯데호텔 정도는 됐다. 물론 북한 특유의 울긋불긋한 수를 놓은 실내장식은 어색했다. 북한에선 이게 고급스러운 것이니 내가 논할 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 백두산 방문은 드라마틱했다. 4열짜리 고려항공을 타고 평양을 출발할 때만 해도 비가 왔다. 천지를 못 볼 수 있겠다는 얘기가 들렸다. 높은 곳의 기후는 더 변화무쌍해서 쉽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삼지연공항(시골 작은 공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에 도착하자 하늘이 믿기 힘들 정도로 열려있었다. 너무 맑은 하늘이었다. 바람도 거의 없었다. 좀 추울거라고 생각했는데 햇볕이 내려쬐니 따듯했다. 불과 한달전에 중국을 통해 왔던 백두산과는 180도 달랐다. 당시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어 옷이 날리고 머리가 헝클어졌었다.
천지를 보는 감회도 남달랐다. 천지는 정말 고요했다. 백두산 장군봉 지대가 높다보니 한 달 전보다 천지가 훨씬 크게 보였다. 중국을 통해 왔을 때 경험하지 못한 천지에 손을 담갔다. 얼음장같은 온도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차갑지 않았다. 물은 엄청 맑았다. 물고기를 비롯해 생물이 산다고 했다. 단군신화가 시작된 곳. 가슴이 뛰었다. 믿기 힘든 2박3일의 여정을 끝내고 다시 서울공항에 돌아왔을 때까지 뛰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통일의 시곗바늘이 더 빨라지길 기대하면서 잠자리를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