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얼굴을 벗어나는 습관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8.09.22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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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강영은 시인 '상냥한 시론詩論'

[시인의 집]얼굴을 벗어나는 습관


2000년 '미네르바'로 등단한 강영은(1956~ )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상냥한 시론詩論'은 온통 얼굴에 집중되어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탤런트처럼 그의 시는 순간순간 감정과 표정을 바꾼다. 웃는 듯 울고, 우는 듯 웃는다. '몰입'을 하다가도 어느새 '방심'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내 안의 죽음과는 다른 바깥"('촛불학 개론')을 보여주기도 한다. 풍선을 놓쳐버린 아이의 떨림에 주목하다가도 "갓 태어난 무덤처럼"('아일란 쿠르디') 해변에서 죽은 난민 아이에게 옮겨진다. '상냥한 시론'이라 했지만 그의 시는 결코 상냥하지 않고, 수시로 낯선 얼굴을 들이민다.

누구에게나 아프리카는 아프리카가 아니겠지만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처럼 어깨를 기대고 싶어 했다 그러는 너는 어깨를 기대었다 너는 언제나 같은 얼굴이었고 따뜻한 벽을 그리워했지만 장작불이 타는 거실은 벽이 되지 못했다 너는 타다 남은 얼굴로 거실을 지나갔다



누구에게나 파프리카는 파프리카가 아니겠지만 파프리카를 고르는 사람처럼 시선을 내려놓고 싶어 했다 그러는 너는 시선을 내려놓았다 너는 언제나 같은 내면이었고 가벼운 포옹을 그리워했지만 한 봉지에 들어 있어도 색깔이 달랐다 빨강, 노랑, 초록, 표정이 다른 너는 비닐봉지 속으로 돌아갔다

아프리카에서 온 파프리카처럼, 타다 만 침묵이 식탁 둘레에 앉아 있다 침묵은 보호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 '타인들' 전문

'나'가 아닌 사람은 다 낯선 타인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힘들 때,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누구에게나 아프리카는 아프리카", 즉 낯선 사람과 만나 같이 산다는 것은, 적응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에게 더 기대고 싶다. 하지만 내가 기대고 싶을 때, 오히려 나에게 기대온다면, 그로인해 '타인의 감정'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너는 언제나 같은 내면이었고 가벼운 포옹을 그리워했지만" 변한 얼굴 표정까지 숨길 수도 없다. 든든한 "벽이 되지 못"한 너는 거실을 지나 다른 비닐봉지 속으로 돌아갔다. 주목해야 할 것은 '들어갔다'가 아닌 '돌아갔다'는 것이다. '돌아갔다'는 것은 원래 있던 자리로 다시 되돌아갔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식탁 둘레에 앉아" 침묵하고 있다. 그 침묵은 죽음보다 깊다. 이 시는 "아프리카에서 온 파프리카처럼" 낯선 사람끼리 만나 살아가면서 점점 타인이 되어가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왜 말 한 마디 안 하고 사는지를 '아프리카'와 '파프리카'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놋그릇을 때려 울음소리를 키운다 때릴 때의 감정으로 노래의 표정을 만든다

그게 뭐니? 동그라미를 그리다 반원만 그린 아이처럼,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 타멜의 날짐승을 날려 보낸다

날짐승의 울음엔 발톱이 숨겨져 있다 산울림에 박히는 발톱 소리


울림은 더 큰 울림으로 끝나지만 높이를 숭배해 온 날개가 파닥인다 돌아오지 않는 화살촉처럼 울음의 테두리가 넓어진다

내가 우는 건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우니까 슬픈 것이다

울음인지 노래인지 분별 못 하는 허공의 따귀를 올려붙여 노래의 표정을 다시 만든다

슬퍼지면 노래를 불러, 부르다 보면 허공이 사라지거든,

놋그릇을 때려 울음소리를 키운다 울음 속을 걷는 너의 전생全生이 노래에 도달한 큰부리까마귀처럼 소리가 맑다

음정도 박자도 버린 채 히말라야를 넘는 슬픈 그릇, 너를 생각하면 아픈 귀에도 방향이 생긴다
- '싱잉 볼singing bowl' 전문

'노래하는 그릇'이라는 뜻을 가진 싱잉 볼(singing bowl)은 네팔·인도·티베트·중국 등 히말라야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명상 도구다. 두드리거나 그릇 주위를 문질러 소리를 낸다. 네팔 카트만두 '여행자의 거리' 타멜에서 싱잉 볼을 접한 시인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묻는다, "그게 뭐니?"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동그라미를 그리다 반원만 그린 아이"의 표정으로 싱잉 볼을 보고 있던 시인은 "놋그릇을 때려" 얻은 소리에서 "날짐승의 울음"과 그 울음에 숨겨진 발톱을 본다. 시인은 "높이를 숭배해온 날개"와 "돌아오지 않는 화살촉"에서 지배와 피지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짚어낸다. 날개의 세계와 화살촉의 세계, 그 둘의 관계는 산울림처럼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감정이 되고, 표정이 된다. 소리에, 슬픔에 감응된다. "놋그릇을 때려 울음소리를 키운" 시인은 "울음 속을 걷는 너의 전생全生"을 본다. 놋그릇의 전생은 곧 시인의 슬픈 전생이다. 울고,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비로소 "허공이 사라지"고, "소리가 맑"아진다. 싱잉 볼 명상으로 내면을 다 비운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음정도 박자도" 다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내 몸을 때려 소리를 내는 '놋그릇'의 슬픈 역사는 그대로 남는다. "히말라야를 넘"어도 놋그릇은 놋그릇인 것이다.

그물에 걸린 종달새를 본 적 있니?

나는, 그 종달새와 그물 앞에 허공을 놓아 주겠다

바람과 햇살이 들락거리며 동아줄이 지닌 감옥을 비워 내리라

내 입술은 그물을 찢는 칼처럼 흐느끼리라
종달새에게는 종달새의 자유를, 나에게는 종달새의 하늘을 달라

종달새가 모든 노래를 풀어 놓으리라

종달새가 모든 노래를 풀어 놓으리라
- '그물과 종달새' 전문


"코와 입을 막고 걸어가는 다리 같은 건 버린 지 오래"('모란의 한낮')라는 시인은 "얼굴을 벗어나는 습관에 젖어버렸"(이하 '거울의 방향')지만 "새들의 비상과 추락에 전념"한다. 봄날, 하늘 높이 날아올라 노래 부르던 종달새는 "그물에 걸"렸다. "종달새에게는 종달새의 자유"를 달라 했지만 결국 나에게 자유를 달라는 것과 다름없다. 내가 종달새이고 종달새가, 곧 나이기 때문이다. 할 말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안타까움과 자유를 향한 간절한 갈망으로 "내 입술은 그물을 찢는 칼처럼 흐느"낀다.

시인은 "입술뿐인 얼굴"('곡성哭聲')을 하고 "한 곳에 갇혀 살기"('라섹')를 원하지만 "세상 저편까지 튀어 오르고 싶은 습관"('쇼show')과 그렇게 살 수 없는 운명임을 알기에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온 얼굴"('몰입의 기술')을 하고 있다. 시인에게 여행은 "혀를 굴리는 먼 맛"('시인의 말')과 같고, 여행에서 만난 낯선 얼굴은 시로 다시 태어난다.

◇상냥한 시론詩論=강영은 지음. 황금알 펴냄. 128쪽/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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