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 K-POP의 새로운 슈퍼 히어로

김리은 ize 기자 2018.09.21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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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미, K-POP의 새로운 슈퍼 히어로


선미의 별명 중 하나는 ‘각선미’다. 연예인들 중에서도 유난히 길고 곧은 다리는 MBC에브리원 ‘주간아이돌’에서 선미 스스로 “다리길이가 110cm”라는 언급을 할 만큼 대중의 관심사였다. 선미가 JYP엔터테인먼트 시절 발표한 ‘보름달’은 소파에 앉아 그의 긴 다리를 흔드는 안무는 선미의 섹시함을 강조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소속사가 바뀌고 선미가 프로듀서로서의 권한을 확실하게 가진 뒤, 그의 다리는 지금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이 된다. 새 앨범 ‘Warning’의 타이틀 곡 ‘사이렌’에서 선미는 다리를 쓰지 못하던 인어를 테마로 삼아, 앉은 채 다리를 못 쓰는 인어를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 인어는 음악이 전개 되면서 앉은 채 곧게 다리를 펴고, 다시 일어나 무대 위를 활보한다. 다리를 이용한 퍼포먼스의 의미는 무용수들이 철창을 만들어 선미를 가두는 부분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철창 안에서 무릎을 꿇었던 선미는 거기서 벗어나며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다. 마치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던 다리가, 자신에게 둘러싸인 것들을 벗어나는 무기가 됐다.

‘사이렌’의 뮤직비디오에서 선미의 집은 ‘Waning’ 표시가 된 노란 테이프로 둘러싸여 있다. 이 집에서 선미는 목욕을 마친 뒤에도 속눈썹 화장은 그대로 두고, 기침을 할 때도 붙인 속눈썹이 날아갈까 조심스러워 한다. 평온하다면 평온한 그의 생활에 변화를 주는 것은 다른 방에서 갑자기 등장한 또다른 ‘선미들’이다. 선미는 자신의 눈 앞에서 ‘사이렌’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또다른 선미 때문에 구토를 일으키고, 왕관을 쓰고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또다른 선미에 무서워한다. 그러나, 선미는 다른 방에서 물 속에서 인어로 살아가는 선미에게 기어이 유혹당한다. 이 인어를 만단 뒤 선미는 다른 ‘선미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하고, 집 밖으로 나갈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간 순간, 선미는 자신이 그 밖으로 한 발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새장 속의 장미. 선미가 가수로서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선미는 또다른 자신이 이끄는 유혹을 따르면서 이전과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평온했던 선미는 다른 ‘선미들’처럼 앉아서 다리를 힘차게 뻗기 시작한다. 그 점에서 ‘사이렌’이라는 제목은 흥미로운 모순을 만들어낸다. 선미는 무대 위에서 ‘사이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유혹하는 존재다. 하지만 유혹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고, 유혹은 그를 동화 ‘인어공주’의 인어처럼 물거품으로 만드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다리로 일어서서 걷게 했다.



JYP엔터테인먼트를 나온 뒤, 선미는 ‘가시나’를 발표했다. ‘가시나’라는 제목에서 보여주듯, 선미는 흔히 볼 수 없는 여성, 미디어에서 ‘걸크러시’로 명명하곤 하는 강해 보이는 여성 캐릭터를 연출했다. 그 뒤 ‘주인공’에서는 여리다, 세다, 청순하다, 섹시하다 같은 이미지에 바탕을 두는 캐릭터 대신 자신에 대한 주도권이 곧 자신에게 있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사이렌’은 그것을 가능케 했던 내면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이상하게, 또는 거부감을 느꼈던 모습도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욕망이었고 유혹이었다. ‘사이렌’에 등장한 인어는 그 욕망의 원형일 수도 있고, 자신의 변화를 시작하는 한 걸음일 수도 있다. ‘보름달’처럼 다리를 대중에게 섹시함을 전달하기 위한 대상화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몸으로 쓰는 것, 또는 ‘가시나’와 ‘주인공’을 거쳐 자신이 노래를 만들고, 무대 위에서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이 어떤 생각을 거쳐 나왔는지 보여주는 것, 더 나아가 그것으로 대중을 인어처럼 유혹하는 것. 그 사이 누군가를 향해 ‘날 두고 가시나’라며 살짝 미련을 던지고, 목소리를 내리던 ‘가시나’의 후렴구는 ‘사이렌’에서 ‘get away out of my face / 더 바라보지마’라며 상대방을 내쫓는, 해방감이 느껴지는 폭발적인 멜로디로 바뀌었다. 몸 그 자체의 생김새로 섹시함을 평가하는 것이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지는 한국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선미는 ‘사이렌’에서 자신의 몸이 가진 의미를 정면으로 뒤집었고, 그럼에도 음원차트 1위를 했다.

물론 선미가 ‘사이렌’에서 무엇을 보여주었든, 그의 다리만을 섹슈얼한 이미지로 소비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선미의 인스타그램에는 종종 악플이 달리기도 하고, 그 스스로도 ‘너무 말랐다’, ‘못생겼다’는 외모 평가에 대한 스트레스를 토로하기도 했다. 선미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여성 가수들은 이런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특히 걸그룹은 늘 대중이 좋아할법한 여성의 모습을 극대화하는 결과물들을 내놓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미는 같은 재료들을 정 반대의 의미로 뒤집으면서, 결과적으로 K-POP이 콘셉트로서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법에 변화를 일으킨다. 대중에게 특정한 판타지를 주는 캐릭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지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캐릭터. 그래서 ‘가시나’-‘주인공’-‘사이렌’으로 이어지는 선미의 캐릭터는 한 아티스트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지금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색깔을 가진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지 증명하는 연대기다. 곡, 안무, 뮤직비디오, 스타일링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그것을 이만큼 선명한 콘셉트로 전달하는 것은 한국 여성 뮤지션의 새로운 성취다. 마돈나와 레이디가가가 자기 자신을 표현하던 방식을, 그들의 영향 안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가 나왔다. K-POP의 기념비적인 순간이다. 그 ‘원더걸스’가 자신의 다리로 서서 세상의 주인공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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