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안에 ‘의병’ 안중근 있다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8.09.2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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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92 – 안중근 : 한국 침략의 원흉을 처단하다

‘미스터 션샤인’ 안에 ‘의병’ 안중근 있다


"아빠 뭐 봐요?”
주말 저녁 본방을 사수하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푹 빠졌는데 유치원생 아들이 거실로 쪼르르 달려 나왔다. 마침 화면에는 1907년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에 맞서 대한제국 시위대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군이 쓰러지고 일장기가 내걸리는 모습을 얼핏 본 아들 녀석이 아빠 손에 이끌려 잠자리로 돌아가다 말고 외친다.



“일본 나빠요!”
그래, 일본은 나빴단다. 실제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을사늑약, 정미7조약을 거쳐 한국을 강제로 병탄하는 과정은 악랄한 야욕과 만행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시 일본에 붙어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도 용서가 안 된다. 이완용, 을사오적, 정미칠적 등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실존 인물들이 큰 화제를 모으고 공분을 불러일으킨 이유다.

종영을 앞둔 드라마는 의병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대미를 향해 치닫고 있다. 잠깐 등장해 전율을 선사한 안창호처럼 그들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새로운 길을 열 것이다. 주인공의 말대로 나라를 빼앗기면 되찾을 수 있지만, 거저 내주면 회복하기 어렵다. 의병들은 끝내 빼앗기더라도 이를 악물고 싸울 것이다. 언젠가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의병항쟁에서 독립전쟁으로 나아가는 그 길목…. 새로운 싸움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또 다른 인물이 바로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다. 그이 또한 의병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북만주의 거점 하얼빈에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당도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 뿐만이 아니었다. 탕! 탕! 탕! 하얼빈역에서 날카로운 총성이 터져 나왔고 이토 히로부미는 고꾸라졌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을 대표하는 일본 정치가다. 초대 총리를 역임하면서 아시아의 문명개화를 주창했기에 한국에도 지지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문명개화라는 허울 좋은 가면 뒤에는 침략자의 얼굴이 감춰져 있었다. 그의 실체는 1907년 초대 통감으로서 고종을 쫓아내고 군대를 해산시키며 만천하에 드러났다.


일제의 폭거는 거국적인 의병항쟁을 불렀다. 해산 군인들이 합류하고 신식 무기까지 손에 쥐자 의병들은 대담한 작전을 펼쳤다. 13도 창의군이 양주에 집결해 서울로 진격한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곧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들어갔고, 의병부대는 국경 너머 연해주와 만주로 이동해 전열을 정비해야 했다. 안중근이 의병으로 나선 것은 이 무렵이다.

“중근은 돔방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영기가 넘치고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새와 짐승을 백발백중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가 묘사한 소년 안중근이다. 백범은 동학혁명에 가담했다가 1895년 잠시 그의 집에 몸을 숨긴 바 있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활달한 기상이 돋보였다. 아버지 안태훈은 박영효 등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한 천주교인이었다. 맏아들 중근도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해 ‘토머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원래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에 뜻을 뒀다. 기울어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면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평양에 석탄회사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경영하는 등 산업과 교육에 열성을 쏟았다. 하지만 1907년 대한제국이 사실상 국권을 잃고 껍데기만 남게 되자 생각을 바꾼다. 그해 12월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의병으로 거듭났다.

청년 안중근은 연해주에서 300여명의 동지를 모으고 교민사회 지도자 최재형의 후원을 받아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1908년 여름 그는 이 부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넜다. 경흥군 홍의동으로 들어가 일본군을 기습한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부대는 회령 영산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부대는 해체되었다.

연해주에서의 의병 활동은 순탄치 않았다. 러시아 당국의 간섭과 통제는 나날이 심해졌고 항일운동 방식을 둘러싼 내부 의견들도 갈렸다. 안중근은 침체된 의병항쟁을 되살리기 위해 1909년 3월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그는 왼손 넷째 손가락 첫 마디를 자른 후 그 피로 태극기에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다. 죽음으로 구국투쟁을 벌이겠다는 결의였다. 안중근은 자신의 목숨을 던져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기회는 왔다. 그해 9월 이토 히로부미의 북만주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러시아가 재무장관 코코프체프를 만주에 파견하고 미국을 끌어들여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려 하자, 이토 히로부미가 회유하려고 10월에 하얼빈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침략의 원흉이 코앞에 이르는데 가만 놔둘 의병들이 아니었다. 이토 처단 계획이 치밀하게 세워졌다.

안중근 일행은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했다. 안중근이 책임자, 우덕순이 보조역, 조도선과 유동하가 통역 및 연락을 맡았다. 이튿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여러 사람들과 역할을 분담해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다. 마침내 그는 10월 26일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데 성공했다.

“소식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감히 통쾌하다고 칭찬하지는 못했지만 모두 어깨를 추켜세우고 깊은 방에 앉아 술을 따르며 서로 경하했다.”
구한말의 문인 황현은 이 의거에 대한 국내의 반응을 ‘매천야록’에 남겼다. 맺힌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순간이었다.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 안중근은 곧 일본 측에 넘겨졌다. 그는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었고 1910년 2월 재판을 받았다. 연해주 교민사회에서는 한국인, 영국인,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다국적 변호인단을 구성했지만 일본 재판부는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주일에 여섯 번 졸속재판이 열렸고 예정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것은 비겁한 재판이었다. 근대국가를 자처해온 일본의 뻔뻔스러운 민낯이었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시종 당당한 태도로 재판에 임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히고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할 것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 15개항을 또박또박 제시하며 자신의 처단은 개인적인 원한에 따른 살인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적군을 사살한 거라고 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함성이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간절한 바람을 유언으로 남기고 3월 26일 의연하게 형장에 섰다. 그로부터 10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유해는 아직도 귀환하지 못하고 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수많은 의병들처럼…. 그래서일까. 그들의 형형한 눈빛과 절절한 목소리가 애틋하게 오버랩되는 ‘미스터 션샤인’이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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