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동안 일본 우토로 마을에서 있었던 일

머니투데이 김지현 기자 2018.08.15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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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조선인들이 피와 눈물로 지켜낸 마을…남은 건 낡은 우토로를 기억하는 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월급을 털어 돕고 싶다 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직접 편지를 보내 응원한 마을이 있다. 일본 교토(京都)부 우지(宇治)시 우토로 51번지 우토로 마을.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하시마섬(군함도)'에 비해 다소 생소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 강제징용의 역사가 담겨 있는 또 하나 장소다. 6천 평의 이 작은 마을엔 고향 같은 땅을 지키기 위해 반세기 넘게 싸워온 조선인들의 눈물이 있다.

비행장 건설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 /사진=아름다운재단비행장 건설에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 /사진=아름다운재단


◇비행장 건설 강제동원…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암흑 같던 일제강점기였던 1942년 일본은 교토에 군 비행장을 만들기로 하면서 사업을 군수기업 일본국제항공공업(항공공업)에 맡겼다. 13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다.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은 마을 옆 부지에서 매일 활주로를 쓸고 닦는 중노동을 했다. 등에 피멍이 들도록 땅을 파며 일했지만 일당은 잡곡 세 홉이 전부. 서로 의지하며 하루를 견뎌야 했던 이들은 버려진 판자와 나무 조각들을 모아 집단합숙소(함바) ‘우토로 마을’을 만들었다.

고국이 해방되던 1945년 8월15일에도 우토로는 해방되지 못했다. 임금 한 푼 제대로 받은 적 없는 주민들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돈이 없었던 것이다. 떠밀려 들어왔지만 직접 지은 집이 있는 우토로 마을에 남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도로는 물론 상하수도조차 없고, 비행장 건설 때 평평하게 깎은 땅 탓에 여름철만 되면 빗물이 무릎까지 차 올랐지만 주민들은 버텼다. 우물을 파서 물을 마련하고, ‘조선인 민족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조선말과 역사를 가르치며 조선인임을 잊지 않았다.

우토로 조선인 민족학교 /사진=아름다운재단우토로 조선인 민족학교 /사진=아름다운재단
◇억압과 차별의 마을 ‘우토로’

1950년 한국전쟁땐 미군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군 비행장 시설을 접수하고 툭하면 총을 겨누며 주민들에게 나가라고 협박했다. 정작 주민들을 괴롭혔던 항공공업 사장은 태평양 전쟁 이후 미 점령군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연행됐다가 이듬해 무죄 석방됐다. 게다가 항공공업은 ‘일국공업’으로 이름을 바꾼 뒤 미군용 자동차와 트럭을 생산해 한국전쟁특수로 큰돈을 벌어들였다.

주민들은 전후 일본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토지보상을 요구했지만 오히려 일국공업은 “땅을 살 거면 돈을 내라”며 수억 엔을 요구했다. 그러다 1962년 일국공업은 닛산과 합병됐고, 우토로 51번지의 토지소유권은 닛산자동차로 넘어갔다.

그 후 30년 우토로는 극심한 차별과 억압 속에 시달렸다. 조선말을 가르치던 조선인 학교는 강제폐쇄 당했고, 경찰은 툭하면 주민들을 조사하고 연행했다. 교토시에서는 아예 우토로를 행정 대상에서 제외 시켜버렸다.

주민들의 시위 모습 /사진=아름다운재단주민들의 시위 모습 /사진=아름다운재단
◇주민들 몰래 팔린 땅

1988년 고국에서 첫 올림픽이 열리던 해, 마침내 우토로에도 첫 상수도가 깔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상하수도 설치로 땅값을 올린 닛산은 주민들의 허락도 없이 이곳을 부동산회사 서일본식산에 매각해버렸다.

하루아침에 우토로의 주인이 된 서일본식산은 조선인들이 땅을 불법 점거하고 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주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들은 법정에서 이곳에 이주해 마을을 만든 배경을 역설했고 닛산 앞에서 시위도 했다. 하지만 소유권은 이미 서일본식산에게 넘어간 뒤였다.

50년 넘게 우토로를 지켜온 주민들을 쫓아내려는 일본 기업의 행태에 일본 시민들조차 ‘우토로 지킴이 모임’이라는 후원회를 만들어 국제사회에 호소했지만 2000년 일본 대법원은 우토로 주민들의 패소 결정을 내렸다.

2005년 시작된 희망모금 캠페인 /사진=아름다운재단2005년 시작된 희망모금 캠페인 /사진=아름다운재단
◇한국에서 날아온 희망

유엔의 퇴거명령 철회권고조차 무시하는 일본정부에 주민들이 지쳐갈 무렵 우토로의 사정이 한국에 알려졌다. 2005년 우토로 국제대책회의가 결성됐고, 한국의 시민들은 ‘우토로 희망모금 캠페인’을 진행했다.

열기는 뜨거웠다. 한일관계의 마찰을 우려한 외교부가 말리며 비록 성사되진 못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 달 치 월급을 기부금으로 내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총 9억원의 성금이 모였고, 2007년 노무현 정부와 국회는 30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주민들은 70여 년의 긴 싸움 끝에 우토로 마을의 3분의 1인 2천 평을 지켜냈다. 2016년 6월 주민들이 들어갈 제1기 시영주택이 첫 삽을 떴고, 지난 2월 39가구가 입주했다. 나머지 20가구도 2020년 완공될 아파트에 들어갈 예정이다. 노무현 정부 때 비서실장으로 우토로를 돕는 시민단체와 면담하고 정부 지원을 추진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시영주택 입주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낡은 우토로 마을 전경 /사진=아름다운재단낡은 우토로 마을 전경 /사진=아름다운재단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낡은 우토로’

비로소 '내 땅'이라는 보금자리를 갖게 된 우토로의 동포들. 하지만 이들은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고 말한다. 바로 조선노동자 합숙소 '함바', 주민들이 투쟁하며 그린 그림과 구호, 낮은 지대의 집이 침수되는 바람에 젖은 기둥의 흔적이 남아있는 '낡은 우토로'를 기억하는 일.

우토로 주민들과 아름다운재단 등 한국의 시민단체 주도로 우토로 평화기념관 건립이 시작됐다. 낡은 우토로는 사라져도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조선인들의 힘으로 지켜온 마을을 보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평화기념관 건립을 위해 필요한 금액은 20억원. 불가능해 보이는 이 금액을 모금하기 위해선 또 한 번의 기적이 필요한 상황이다.

지난 4월22일 우토로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열린 시영주택 입주기념식에서 우토로 마을의 마지막 1세대인 강경남 할머니는 '소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토로를 다시 잊지 않는 것, 기억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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