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임종철 디자인 기자
지난해 8월8일이 그랬다. 특별한 날은 아녔다. 굳이 따지자면 '세계 고양이의 날' 정도였다. 아침에 알람을 다섯 번 끈 뒤 겨우 몸을 일으키고, 모르는 이와 인상을 찌푸리며 만원 지하철을 견디고, '벌써 퇴근하고 싶다'는 표정으로 출근한 날이었다.
커피사(史)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시작됐다. 2대2 미팅 때였다. 첨 마시는 주제에, 있어보이려고 '에스프레소'(고온, 고압으로 추출한 아주 진한 이탈리아식 커피)를 주문했었다. 뭔지도 몰랐었다. 작디 작은 잔을 우습게 봤다가, 엄청 쓴 맛에 '이런 게 어른 세계인가' 애써 웃었던 기억. 그 때부터 졸릴 때 잠을 쫓는 용도로 종종 마셨었다.
서울 망원동 한 카페서 1년 전 여름, 마지막으로 마신 아인슈페너(아메리카노에 설탕과 생크림을 얹어 만든 커피). 진한 커피에 달달한 크림이 일품이다./사진=남형도 기자
일본 의학박사 탄베 유키히로는 저서 '커피과학'에서 이를 '카페인 중독'이라 했다. 단기간 대량의 커피를 마셨을 때 나타나는 급성 증상이라는 것. 탄베 박사는 "카페인 250mg 이상을 섭취했을 때 신경과민과 안면홍조 등 12개 진단항목 중 5개 이상이 나타날 경우"라고 설명했다. 불안과 불면, 손발 떨림, 속쓰림 등이 주요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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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전 8시, 처음으로 커피 대신 허브티를 마셨다. 카페인이 1g도 없는 '캐모마일차'(땅에서 나는 사과라는 뜻의 이름의 허브)였다. 아내가 커피 대신 마시라고 예전에 사줬었다. 캐모마일차 10포, 루이보스차 10포 등 허브티가 총 20포였다.
이내 '커피 금단 현상'이 시작됐다. 오전 9시가 되자 졸음이 쏟아졌다. 30분이 더 지나자 머리가 의지와 상관 없이 땅으로 수렴했다. 건너편에 앉은 후배들 보기가 부끄러워 화장실에 갔다. 다시 돌아왔는데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성실한 기자 이미지였는데, 당황했다. 고3 수험 생활 때 잠을 쫓던 극약 처방을 내렸다. 찬물 세수를 하고, 양쪽에 셀프 귓방망이를 날리며 물기를 말리는 거였다. 잠은 좀 달아났지만 머리는 멍했고, 집중이 잘 안됐다.
커피 대신 회사 책상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텀블러와 캐모마일 티백. 심신 안정에 도움을 준다./사진=남형도 기자
한 달 정도는 이 같은 증상이 이어졌다. '카페인 의존' 이었던 것. 탄베 박사는 "카페인 의존은 일반적으로 하루 섭취량이 400mg을 넘는 상용자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정의했다. 기자가 하루에 마셔오던 커피는 아메리카노 평균 3~4잔으로, 카페인 섭취량이 375mg~500mg에 달했다. 카페인 의존 증상은 두통과 집중력 저하, 피로감, 졸음 등이다. 두통 등 신체증상과 불안 등 정신증상이 동반된다. 탄베 박사는 "카페인을 요구하는 갈망은 있지만, 먀악 등과는 달라서 의지력만으로 충분히 자제 가능한 범위"라고 설명했다.
영국 바리스타 트리스탄 스티븐슨은 저서 '커피 상식사전'에서 "카페인 공급이 끊기면 늘어난 아데노신 활동으로 우리 몸이 평소보다 더 큰 피로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게 바로 '카페인 금단 현상'"이라고 알려줬다. 심한 감정기복을 느낄 수도 있다고 했다. 카페인이 기분이나 식욕, 수면 등을 조절하는 세르토닌이란 물질의 생성과도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과정은 험난했다. 카페에 가서 커피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당겼다. 피로감은 심해졌고,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드는 날도 있었다. 그냥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또 단체 생활에서 커피를 안 마시는 건 왠지 튀는 행동이기도 했다. 다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캐모마일을 외쳐야 했다. 허브티는 가격도 5000~6000원대로 대개 비쌌다. 티백 하나 넣은 차란 생각에 아까운 생각도 들었다. 엄밀히 말해, 허브티가 커피 대체재가 되긴 힘들었다. 심신 안정엔 도움이 됐지만, 맛이 별로 없었다. 만족감을 크게 주지 못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집에서 커피 대신 차 한 잔을 마시는 게 일과가 됐다. 사진은 예뻐 보이게 찍은 연출샷이다./사진=남형도 기자
달라진 건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다. 좋은 건 몸이 내는 소리에 좀더 정직하게 귀 기울이게 됐다는 것. 피곤한 몸을 그때 그때 알아차릴 수 있게 됐고, 이를 억지로 깨워 쥐어짜지 않고 졸릴 때 쪽잠이라도 자서 피로를 풀어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어느 순간 만성피로가 오히려 줄고 몸이 개운해 졌다. 또 커피를 마실 땐 잠시 각성 효과가 있었지만 알 수 없는 극심한 피로가 몰려 왔었는데, 이 같은 피로감도 사라졌다.
밤 11시만 되면 견딜 수 없는 졸음이 밀려와 푹 잘 수 있게된 것도 복(福)이 됐다. 커피 각성 효과가 사라진 탓이다. 하루 활동으로 피로해지면 두뇌엔 아데노신이 쌓이는데, 커피 속 카페인이 아데노신 대신 수용체에 달라붙어 졸림 유도를 방해했었는데, 그런 게 사라졌다. 그리고 이따금씩 커피를 과량 마셨을 때 속이 쓰렸던 것도 해결됐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도 없어졌다.
제주도를 찾았을 때 커피를 마시며 찍은 과도한 설정샷. 커피를 끊은 지금도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커피 상식사전'에 따르면 커피는 직접 단맛을 내는 음료는 아니지만, 로스팅 과정에서 익숙한 달콤한 향기와 원두 내부 복잡한 당분과 캐러멜 성분이 만나 혀에 달콤한 느낌을 준다. 후각으로 느끼는 아로마(커피 향)는 단순히 코로 들이마시는 냄새뿐 아니라 입 안에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숨을 내쉴 때도 느낀다. 커피가 그간 인생에서 여러 '풍미'를 더해줬던 건 분명한 것 같다.
건강이 우려된다면 FDA(미국 식품의약국) 권장 하루 카페인 권장량을 지키면 된다. 하루 최대 400mg이다. 아메리카노(125mg) 기준 하루 3잔, 콜드브루(212mg) 기준 두 잔이 안되는 정도다.
/그래픽=유정수 디자인기자
이진성 코니셔클럽커피 대표는 저서 '닥터 커피'에서 커피와 각종 질환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이는 △심혈관 질환(하루 3~5잔 블랙커피 마시는 사람 발생률이 가장 낮음) △뇌졸중(하루 2~6잔 커피 마신 사람이 한 잔도 안 마신 사람보다 위험 낮음) △심장마비(하루 4잔 마시면 위험도 가장 낮고 10잔 이상 역효과) △간암(커피 마시는 사람이 안 마시는 사람보다 40% 가까이 간세포 암종 위험 줄임) 등이다. 반면 '커피 과학'에선 커피가 △카페인 이탈 두통 △임산부 유산 위험 증가 △패닉 증후군 증상 악화 △방광암 위험 증가 △항우울증 약 효과 저하 등 부작용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