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그리는 인생

김서연 ize 기자 2018.07.2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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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그리는 인생


지난 6월 12일,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조금 특별한 형식의 연극 하나가 막을 올렸다. 연극열전7의 두 번째 작품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2009년 출간 이후 전 세계 35개국에서 천만 부 이상 판매된 동명의 스웨덴 소설을 원작으로, ‘더 헬멧’, ‘카포네 트릴로지’ 등에서 호흡을 맞춘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가 방대한 원작을 압축하여 다시 만들었다.

100세 생일날 양로원 창문을 넘어 탈출한 알란은 우연히 갱단의 돈 가방을 훔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은 알란이 살아온 100년의 이야기와 함께 코믹하게 교차 전개된다. 100년에 이르는 알란의 삶 속에 등장한 60여 명의 인물들과 코끼리, 개, 고양이까지 단 5명의 배우가 전부 소화해내면서 순식간에 캐릭터를 바꾸는 1인 다(多)역 ‘캐릭터 저글링’과 성별에 얽매이지 않는 ‘젠더 프리’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5개의 배역이 전부 ‘알란’(100세 알란, 알란1, 알란2, 알란3, 알란4)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남녀 더블 캐스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방대한 양을 압축한 만큼 150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과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드물게 인터미션까지 있지만 무대는 결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알란의 기억 창고처럼 장식장으로 이루어진 무대는 서랍마다 알란의 시간을 담고 있으며 스페인, 미국, 중국, 이란, 러시아, 북한, 인도네시아, 프랑스 등 세계 곳곳을 다닌 알란의 여정은 각 나라의 이야기가 전개될 때마다 각국의 건배사와 함께 전통춤이 등장하여 무대가 바뀌었음을 실감케 한다. 그리고 각 나라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는 웃음을 선사하고, 그로 인해 이어나가는 인연은 감동을 준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이렇게 많은 역사적 인물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알란의 100년에 세계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집어넣어 한 사람이 살아가며 얼마나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만나고 겪으며 살아가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그 안에서 인생의 가치와 친구의 의미를 보여준다. 여기에 연극은 원작의 의미에 더해 성별과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대상을 바라본다. 1인당 평균 12명의 배역을 소화하는 무대는 모두가 알란인 동시에 다른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남녀 구분이 가지 않는 비슷한 의상을 입은 대신 모든 인물들을 이름표로 붙여 나타낸다. 얼핏 보면 그것만으로 등장인물의 구분이 가능할까 싶지만, 도리어 비슷한 의상과 이름표라는 간단한 장치는 극 속으로 몰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 동안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모습과 이름에 얼마나 구애받았는가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틈틈이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배우들을 이렇게 고생시키는 연출과 작가에 대해 항의하듯 불평을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무대에 대한 집중력을 해치지 않고 이 특이하고 유쾌한 무대에 대한 재미의 하나가 된다. 그리고 원작에는 없었던 알란과 고양이 ‘몰로토프’의 에피소드를 넣는다. 몰로토프를 잃고 집도 잃어 양로원에 가게 된 알란은 하면 안되는 것들 투성이인 그 곳에서 평생 몸에 지니고 살아왔던 성냥갑까지 빼앗기게 된다.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공허해진 알란에게 몰로토프는 다시 성냥을 흔들라고 말한다. 알란이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의미를 찾길 바라며. 그래서 알란은 100세 생일에 다시 창문을 넘어 떠나려 한다. 자신을 찾아서 느리지만 천천히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그렇게 무대는 재미와 의미를 품고 감동으로 그 긴 시간을 마무리한다.

무대란, 그 어떤 것보다 입체적인 만큼 더 많은 도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새로운 무대와 젠더 프리 캐스팅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고, 베스트셀러지만 한편으론 책을 보다가 덮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원작에 대해 도전할 용기를 주었다. 무엇보다 알란이 보여준 100년의 기억은 지나온 시간이 전부 각각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100세가 되어 다소 느려지더라도 포기하지도 잃어버리지도 말자고 말한다. 시간의 의미가 달라지고,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소중한 것을 포기하기 쉬운 요즘,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봐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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