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같던 문 대통령 연설문, 번역 어려워”

머니투데이 김고금평 기자 2018.06.2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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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모란장 받는 해외문화홍보원 귀화 공무원 에리자벳지크랩트…“큰상 줘서 영광이지만 50년 못 채워 아쉬워”

지난 40년간 영역(英譯) 감수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문체부 해외문화홍보원의 귀화공무원 에리자벳지크랩트 씨. /사진=김고금평 기자<br>
지난 40년간 영역(英譯) 감수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는 문체부 해외문화홍보원의 귀화공무원 에리자벳지크랩트 씨. /사진=김고금평 기자


미국명은 엘리자베스 지. 크래프트(Elizabeth G. Kraft)이지만, 한국에 귀화하면서 에리자벳지크랩트(이하 에리자벳)라는 한글명을 주민등록증에 올렸다.

올해 78세인 에리자벳은 1960년대 후반, 미국 아메리칸대 석사(동아시아) 과정을 밟다가 당시 이 대학 박사 과정에 있던 한국인 이하우(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사무총장)씨와 결혼한 뒤 한국에 귀화했다.



고위공무원이던 남편을 따라 그도 77년 문화공보부 해외공보관(해외문화홍보원)에 입사했다. 맡은 일은 주로 대통령 연설문을 비롯해 외국 정상에 대한 대통령의 친서 등 특별하고 중요한 내용을 영역(英譯)하는 것이었다.

에리자벳은 국내 초벌 영역 번역자들이 번역한 연설문 등이 '콩글리시'가 되지 않도록 정확한 문장으로 다듬거나 수정하는 감수 작업을 통해 내용의 품격을 높였다.



그렇게 이 분야를 전공하듯 다뤄온 지 41년 6개월. 정부는 그간 영역 감수 분야에서 외국인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공로로 29일 퇴임식에서 ‘국정 해외홍보 유공’ 분야 국민훈장 모란장(2등급)을 수여한다.

에리자벳은 퇴임을 앞두고 2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영광스럽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큰일을 했는지 쑥스럽다(embarrassed)”며 “원래 50년 근로를 목표로 했는데, 채우지 못해 섭섭한 마음도 있다”고 수상 소감을 미리 전했다.

귀화 공무원이 모란장을 받는 경우도 이례적이지만, 40년간 한국에 살며 한국어 한마디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것도 생경했다. 에리자벳은 “초창기엔 어학당도 다니고 개인 선생님도 구해 한국어를 배웠는데, 기억력이 나빠서 도저히 외울 수가 없었다”며 “그 점은 지금도 부끄럽다. 하지만 한국어를 모른다고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고 했다.


궁금했다. 수많은 한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영역 하면서 그가 어떻게 느끼고 평가했는지. 에리자벳은 “특별하게 인상 깊었던 적은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과 한국의 그것은 많이 달랐어요. 미국 연설문이 대중에게 영향을 주는 스피치에 방점을 찍는다면, 한국은 매년 어떤 계기로 나오는 세레모니(의식) 느낌이 강했죠. 연례행사에 맞추는 느낌이랄까요.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쓴 연설문을 보면 누가(어떤 대통령) 썼는지 맞추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다만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시적 표현이 많아 번역할 때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에리자벳지크랩트 씨. /사진=김고금평 기자<br>
에리자벳지크랩트 씨. /사진=김고금평 기자
초창기,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인이 드물어 영역 자료를 단어별로 번역해 오는 ‘웃픈’(웃기고 슬픈)일들이 적지 않았다.

“한번은 단어로만 번역해 와서 이걸 영어로 들으면 지금 대통령이 ‘바보처럼’ 얘기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지적하며 매일 논쟁을 벌였어요. 특히 외신 기자를 상대로 한 연설문 번역은 더 중요했어요. 문장으로 의미를 살려야 외신 기자들이 비판을 목적으로 기사를 써도 균형감을 갖출 수 있으니까요.”

대한민국 격변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한국인 에리자벳은 두 가지 지점에서 환희와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고 했다. 가난으로 점철된 나라가 급속도로 산업화한 ‘기적’이 환희의 시선이고, 정착한 민주주의가 드러내는 부끄러운 속살이 절망의 대상이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이 직접 선거를 발표했을 때, 그날 직원들과 엄청 맥주를 마시며 민주주의를 얘기해서 기뻤는데, 그 민주주의가 요즘 국회에선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것 같아요. 미국은 보수와 진보가 다른 캐릭터를 가져도 타협(compromise)이 잘 되는데, 한국 국회는 리더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해서인지 타협하면 마치 진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것 같아요.”

에리자벳은 그럼에도 “한국에 살아서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해온 일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어 아쉽다는 그는 “퇴직 후 여행 대신 문학클럽 활동과 영어 번역 일에 매달릴 것”이라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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