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반지에 오롯이 너를 새기다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18.05.19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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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황종권 시인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

[시인의 집]반지에 오롯이 너를 새기다


201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 예술 인력에 선정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황종권(1984~ ) 시인의 첫 시집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에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한 청춘의 삶이 드러난다.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았지만 세상(대도시)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한 곳에 정착하기 위해 한껏 자세를 낮추지만 "폐허로 무너진 세계"를 마주할 뿐이다. 방황하던 청춘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사랑의 힘이다.



가시덤불로 뺨을 부비고 싶었다 참혹이라는 말의 내부에서
성곽이 무너질 때

소매 한쪽이 물들었고, 그걸 균열이라고 발음하면
팔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부르면서 가까워지는 호칭은
사랑을 이루는 호명이거나
혀 돌기로 솟구친 쉼표가 되거나
폐허로 무너진 세계를 최대한 느리게 입에 담는
농담이 되었다

농담을 아메리카노 한 모금으로 적실 때
잇몸이 뜨거웠다
나는 한참을 등 돌린 그림자로 있었다
그림자에는 속눈썹이 긴 짐승이 살았다

어떤 소문은 숙연하도록 엎지르는 물이 되었고
뺨을 자꾸만 길어지게 하였다


그런 오후, 나는 당신의 심장 속에서 첫눈이고 싶었다
기묘한 감정을 수집하는 래퍼가 되고 싶었다
- '뺨이 길어지는 오후' 전문


이종격투기와 유도를 한 시인이 세상과 한판 대결을 벌이고 있다. "주먹이 쏟아지는 링 위에"서는 실력과 약간의 행운이 승패를 좌우하지만 세상은 실력보다는 '조건과 환경'이 삶의 성패를 좌우한다. '여수촌놈'인 시인은 사회라는 경기장에서 미처 자세를 잡기도 전에 "소매 한쪽"이 잡혀 "팔이 부서"진다(실제 경기에서의 패배일 수도 있다.). "가시덤불로 뺨을 부비고 싶"을 만큼 참혹한 심정이다. "폐허로 무너진 세계"를 간신히 지탱시켜주는 것은 시시껄렁한 '농담'이다. "나는 한참을 등 돌린 그림자로 있었"으므로 농담은 '좌절'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뒷모습을 흘리지 말라"는 엄마의 충고를 잊어버리고 "젖은 눈을 들"켰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이 세계를 부수고 싶은 꿈"이 좌절된 후 "속눈썹이 긴 짐승"으로 산다. 짐승이란 링 위에서 싸우고 싶은 야성이기도 하지만 인식하기 이전에 몸이 기억하고 있는 습성이다. 한 세계를 떠나면 뒷말이 무성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꿈을 잃고 방황하던 청춘을 세상 밖으로 다시 끌어낸 것은 사랑이다. "당신의 심장 속에서 첫눈이고 싶"어 "기묘한 감정을 수집하는 래퍼", 즉 시인으로 삶의 방향을 선회한다.

붉은 여우가 왔다 일출이 절벽을 딛고 오기 전에 왔다 목덜미 가진 것들을 파헤치고 왔는지 주둥이가 붉었다

마을에서는 볏이 붉은 것들 몇 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지붕에 발자국이 찍힌 것으로 보아 수컷은 아니고 암컷이라고 했다 붉음과 어둠의 경계에 산다는 동백이라는 소문만 들렸다

여우는 향일암 염주를 물고 천 년을 내딛고자 했다 그러나 물고기들 풍경 속에서 헤엄칠 때마다 짓뭉그러진 입술과 타다 만 향기가 절벽을 키우고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해일에도 더렵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절벽의 힘으로 몸에 붉은 기운을 밀어 넣는 것들이 있다

제 배설물을 꽃잎으로 바꿔놓는 붉은 여우, 그늘에 들 듯 제 영혼을 동백으로 씻고 있다 저건 그냥 막막한 나무일뿐인데, 봄밤이 들어가는 문이다 들어가면 숨이 붉어지는 방이다
- '이 붉어지는 방' 전문


제18회 여수해양문학상 시 부문 대상작인 이 시는 여수 향일암 절벽에 핀 동백과 일출을 "붉은 여우"의 전설로 풀어내고 있다. "독특한 상상력이 무리 없이 전개되는 것도 좋았고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능란한 언어구사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는 심사평에서 알 수 있듯,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결성이 뛰어나다. 붉은 여우가 향일암의 일출과 동백 사이를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는 몽환적이다. 특히 4연은 절창이다. 동백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붉은 여우의 배설물로 치환한 것도 돋보이지만 "그늘에 들 듯 제 영혼을 동백으로 씻고 있다"는 문장은 이 시를 '사유의 절벽'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또한 "막막한 나무"에서 "봄밤이 들어가는 문"과 "숨이 붉어지는 방"으로 이어지는 상상력은 이 시의 백미(白眉)다. 일출의 기운을 받은, 동백의 개화와 낙화를 통한 봄밤의 사랑(잉태)은 소중한 생명의 탄생을 기대케 한다.

우리는 전혀 다른 색으로 훌쩍거리는

피 냄새를 맡고 있었지만

핏줄을 태우는 구름 앞에서 부동자세였다

학대받지 않는 도로는 없었으므로

미신을 능가하는 속도가 우리의 상처였다

상처에 빛이 고이면

깜빡거리는 뺨이 되었다
- '신호등의 뺨' 전문


이종격투기와 유도 선수, 몸은 떠났지만 마음마저 떠난 것은 아니다. 발, 무릎, 등, 짐승, 소매, 자세, 허공 같은 시어들이 행간에서 출렁거리는 것이나 수시로 숫자와 시간을 헤아리는 것도 그런 경험과 연관이 있다. 유도에서 상대방에게 소매가 잡혀 발이 허공에 뜨는 순간 그대로 등이 바닥에 닿아 '한판' 패를 당하고 만다. 자세를 낮추고 몸의 균형을 잡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미신이나 주술 같은 것이 통하지 않는 것이 운동경기다. 오직 실력으로 승부할 뿐이다. "가시덤불로 뺨을 부비고 싶었다"거나 "깜빡거리는 뺨"도 이종격투기를 연상시킨다. 뺨은 부끄러움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 곳이면서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맞을 수 있는 위험한 부위다. 순식간에 게임이 끝날 수 있다. 사랑싸움도, 내가 개입할 수 없는 타인의 상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서 있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색"을 띠고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개입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눈만 깜빡깜빡하면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더 큰 상처를 만든다.

그래도 삶을 온전히 지켜주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책"(이하 '청혼')이기 때문이다. "눈동자도 없이// 캄캄한 밤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것도 결국 사랑의 힘이다. 이제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적고 싶"은 사람을 만났으니 발가락에 힘을 주고 자세를 바로 세울 때다. 그래야 "상처 없이도 아물지 않는 밤"('시인의 말')을 견디면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지에 오롯이 너를 새긴" 시인은 지금, 너무 행복하다.

◇당신의 등은 엎드려 울기에 좋았다=황종권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116쪽/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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