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자동차와 현대차, 10조원을 쓰는 다른 방법

머니투데이 김재현 이코노미스트 2018.03.1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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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보고 크게놀기]지리의 벤츠 지분 인수와 현대차의 한전부지 인수

편집자주 멀리 보고 통 크게 노는 법을 생각해 봅니다.

/그래픽=임종철 디자이너/그래픽=임종철 디자이너


개혁개방의 열기가 중국을 휩쓸던 1986년, 23살의 청년 한 명이 상인기질로 유명한 저장성에서 창업했다. 이 청년은 냉장고 부품을 만들다가 냉장고로 제품라인을 확대했고 내친 김에 자동차산업에까지 뛰어든다.

벤츠 모기업인 다임러의 지분 9.7%를 90억달러(약 9조6000억원)에 인수한 리수푸 지리자동차 회장 얘기다. 우리나라는 현대차의 중국사업 부진이 큰 이슈지만, 중국은 지리자동차의 거침없는 인수합병이 큰 화제다.



◇중국 자동차 굴기의 대표기업
지리자동차가 중국 자동차 굴기의 대표기업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지리자동차는 중국시장에서 124만8000대에 달하는 자동차를 판매하며 중국 전체 6위, 토종 자동차 기업 중 1위를 차지했다. 판매대수는 전년 대비 무려 59% 증가했다. 반면 베이징현대는 판매대수가 31% 감소한 78만5000대에 머물며 10위로 밀려났다. 사드배치 문제의 영향도 있지만, 중국 본토 자동차기업이 성장하면서 달라진 경쟁구조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1~2월 지리자동차 판매대수(26만4000대)는 전년 대비 62%나 증가하며 중국 전체 4위로 부상한 반면, 현대차 판매대수(11만3000대)는 전년 대비 29% 감소하며 10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지리자동차의 상승추세와 현대차의 하락추세가 여전하다.



지리자동차는 어떻게 급성장하게 된 걸까? 성장의 계기가 된 건 볼보 인수다. 리 회장은 3년 간에 걸친 지리한 협상 끝에 2010년 8월 볼보를 27억달러(약 2조9000억원)에 인수했다. 당시 지리자동차가 가용 자금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지리는 볼보 생산라인 건설을 빌미로 지방 정부로부터 대부분의 자금을 지원받았다.

지리에 인수된 후 볼보는 중국 시장에서 급성장했으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턴어라운드에 성공했다. 지난해 볼보 판매대수는 57만2000대를 기록했으며 중국 시장에서만 11만4000대를 판매했다. 2010년 3만대 대비 3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볼보 인수를 통해서 지리자동차 역시 기술과 브랜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2017년 지리자동차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올해 초 밝힌 실적예고에서 지리는 지난해 당기순익이 전년(51억위안, 약 8700억원) 대비 100% 넘게 증가했다고 밝혔다.


주가도 급등했다. 2016년 초 3홍콩달러에 불과하던 지리자동차 주가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난 13일 지리자동차는 26.5홍콩달러로 거래를 마쳤고 시가총액이 우리 돈으로 약 32조원에 달한다.

인수합병의 단맛을 본 지리는 더 거침없는 해외 인수합병에 나섰다. 지난해 6월 지리는 말레이시아 자동차 회사인 프로톤 지분 49.9%와 영국 스포츠카인 로터스 지분 51%를 인수했다. 11월에는 하늘을 나는 플라잉카를 개발 중인 미국 스타트업 테라푸지아도 사들였다.

지난해 12월에는 상용차 부문인 볼보AB의 지분 8.2%(의결권 15.6%)를 32억5000만유로(약 4조3000억원)에 인수하며 최대주주가 됐다. 여기에 화룡정점의 역할을 한 게 다임러 지분 인수다.

◇지리의 다임러 지분인수와 현대차의 삼성동 한전 부지 인수
지리의 다임러 지분인수 뉴스를 듣고 떠올린 건 현대차의 삼성동 한전 부지 인수다. 금액 규모도 엇비슷하다. 9조6000억원과 10조5500억원. 현대차가 땅을 사는 대신 다임러 지분을 살 수는 없었을까?

지리자동차는 현대차와 비교도 되지 않던 기업이다. 2010년 볼보를 인수할 때도 뱀이 코끼리를 삼켰다고 할 만큼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이번 다임러의 지분인수 과정도 드라마틱하다. 중국의 저장성 출신 상인인 리수푸가 누구도 생각지 못한 기발한 금융기법으로 다임러 지분을 9.7%나 인수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지난해 리수푸가 다임러에게 지분인수와 기술 공유 협정 체결을 타진했지만, 다임러는 단 칼에 거절했다. 외신에 따르면 리수푸는 즉시 홍콩 페이퍼 컴퍼니와 파생상품, 은행 파이낸싱 및 주식옵션 같은 방법을 총동원해서 암암리에 다임러 지분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투자진행과 자금조달은 모건스탠리와 BOA메릴린치를 활용했다. 또한 지리는 모건스탠리 출신 인사를 고용해서 독일의 주식대량보유공시제도를 피하는 방법을 강구했다. 독일은 주식을 3% 이상 보유하게 될 때와 5% 이상 보유하게 될 때 공시를 의무화하고 있다.

리수푸의 다임러 지분 인수작전은 대성공이다. 누구도 리수푸가 지분을 9.7% 매입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독일에서 주식대량보유공시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리자동차와 다임러의 움직임은 남 얘기가 아니다. 현대차한테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리의 다임러 지분인수가 알려졌을 무렵, 다임러는 베이징벤츠와 공동으로 약 2조원을 투자해서 중국에 생산라인을 신규 건설한다고 밝혔다. 베이징현대의 중국측 파트너인 베이징자동차는 벤츠와 합작사인 베이징벤츠를 운영하고 있다.

향후 베이징자동차가 고급 브랜드 이미지가 부족한 베이징현대보다 베이징벤츠에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지리자동차의 다임러 인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자동차 기업의 목표는 이제 현대가 아니라 벤츠다. 중국 자동차기업의 성장으로 인해 지금은 중국 시장에서 현대차의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앞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기업이 직접적인 경쟁기업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짝퉁만 만든다고 얕보던 중국 자동차기업이 ‘야성적 충동’으로 가득찬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가 걸을 때, 그들은 뛰었던 것이다. 만약 현대차가 10조원을 가지고 땅을 사는 대신 인수합병에 나섰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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