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지, 아시안계 음악인이 새로운 취향을 낳을 때

서성덕(음악 칼럼니스트) ize 기자 2017.12.1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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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아시안계 음악인이 새로운 취향을 낳을 때


뉴욕에서 활동하는 인디 뮤지션이 한국에서도 관심을 받는 경우는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인이거나, 한국에 대한 욕을 했거나. 예지(Yaeji)는 한국인이다. 예지가 아니었다면, 영국 BBC가 유망한 신인 아티스트를 선정하는 ‘사운드 오브 2018’ 1차 후보(Longlist) 발표에 대한 이야기를 국내 일간지에서 만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국적에 관계 없이, 다시 말해 한국에서 그를 인지하거나 말거나 그는 좋은 아티스트다. 심지어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다. 칼리드처럼 이미 미국에서는 스타 반열에 오른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운드 오브 2018’ 16명 안에서 그의 인지도는 상위권에 속한다고 보아도 좋다. 현재 분위기를 본다면 2차 후보(Shortlist)에 오를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는 2016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올해 봄 ‘New York 93’과 함께 첫 번째 EP를 발표한 시기다. 페이더, 스테레오검, 피치포크처럼 장르나 규모에 관계없이 새로운 음악을 소개하는 매체들이 리뷰, 추천트랙 등 다양한 형태로 그를 다루기 시작했다. 지난 10월 ‘drink i’m sippin on’은 전환점이 되었다. 피치포크가 ‘Best New Track’으로 뽑고, 스트리밍 서비스 타이달이 스태프 추천 트랙으로 올리면서 그녀에 대한 인지가 급상승했다. 올 해 발표한 트랙을 모아낸 ‘EP2’가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쯤에서 ‘사운드 오브 2018’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빌보드 앨범 차트 4위까지 오른 칼리드를 ‘미래가 기대된다’며 슬쩍 끼워 넣는 BBC의 때때로 이상한 자존심을 생각하면, 뉴욕에서 주로 활동하는 아시안 뮤지션의 존재감은 특별할 수 밖에 없다. 공연을 중심으로 신진 아티스트 소개에 특화된 유명 음악 블로그 ‘고릴라vs.베어’가 ‘우리는 2016년부터 예지가 터질 줄 알았다’며 올해의 앨범 1위에 그의 EP 2장을 올린 이유다. 피치포크는 올해의 앨범과 트랙에 모두 예지를 포함했다.

그렇다면 예지의 무엇이 중요한가? 다양한 기사와 인터뷰의 공통분모를 뽑아 낸다면, 이질적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를 자연스레 한 몸처럼 구사하는 스타일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으나 미국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스스로 시각에 관한 예술 작업에 적합하다고 여겼으나, 독학으로 음악 만들기를 익혔다. 지금 그는 하우스 DJ이자 댄스 음악에 자신 만의 방식으로 랩과 독백 중간에 머무는 목소리를 얹어 그루브를 부여하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한국어와 영어를 뒤섞어 청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와 그렇지 않은 메시지를 구분하고, 각 언어가 지닌 말의 질감을 모두 활용한다. 그의 의도에 충실하자면, 한국어를 사용하는 청자는 원래의 계산 밖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메시지가 아니라 텍스쳐를 알아 듣는다!



예지는 더 중요해질 것인가? 아직까지 본 바로 그렇다. 세계 각국의 소규모 공연을 중개하는 ‘보일러 룸’ 프로젝트의 유튜브 채널에서 그의 지난 10월 뉴욕 DJ셋 조회수는 30만회를 바라본다. 제이미XX 같은 초월적 인기를 자랑하는 아티스트를 제외하면 ‘보일러 룸’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DJ셋에서 그는 자신의 오리지널 트랙에는 라이브 보컬을 얹고, 동시대의 댄스/일렉트로닉 트랙은 물론 전통적인 하우스와 디스코까지 고루 표현한다. 그의 가장 뛰어난 오리지널 트랙들은 그 취향의 근본을 이루는 과거의 클래식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현대적인 업데이트를 담고 있다. 보컬 샘플을 자신의 목소리로 대체하는 미니멀 하우스에서 출발하지만, 활동을 거듭하면서 그만의 방식에 따른 랩을 만나 트랩 취향까지 건드린다. 그녀의 이름 ‘Yaeji’가 의도적인 것이라면 똑똑하기까지 하다. 21세기의 아티스트라면 구글에서 자기 이름을 검색했을 때 온갖 동명이인 속에 파묻히는 것을 피할 줄 알아야 한다. ‘Yeaji’를 검색해보라.

그는 최근 서양 음악에서 아시안 계통 음악인들의 부상이라는 맥락 안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경우다. 요컨대 장르적으로 명쾌한 완성도와 취향을 자랑하면서도, 자신이 아시안이라는 사실, 혹은 거기에 따른 선호나 배경, 언어를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이용한다. (‘자랑스럽게’가 아니다.) 올해 연말리스트에서 필리핀계 제이 솜(Jay Som)이나 또 다른 한국계 재패니즈 브렉퍼스트(Japanese Breakfast) 같은 팀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들은 재즈 기반의 일렉트로닉 혹은 간결한 인디록에서 완성도를 자랑한다. 작년에 각광받았던 중국계 주(ZHU)나 올해 앨범을 낸 대만계 지라패지(Giraffage)도 마찬가지다.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 혁오의 은근한 인기도 음악적으로 보면 이 취향의 연장이다. 미국에서 아시안계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음악을 하는 이들도 많아지는 것은 통계적으로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 산업에서 비중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발굴이고, 인디 음악의 아시안계는 주류 음악계 라틴 팝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예지는 지금 중요하고, 앞으로 더 중요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단순히 한 아티스트의 부상을 넘어, 2017년에는 좀 더 크고 새로운 취향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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