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이 허락한 페미니즘

강명석 ize 기자 2017.11.2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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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인이 지난 26일 페이스북에 쓴 글은 그가 “신념과 사랑과 시대정신을 담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으로, “320자의 트위터나 그림으로 말하는 인스타그램의 부작용으로 집단 난독증을 앓고 있는 신(新) 인류에게는 매우 길고 어려운 글”이고, “자연을 글로 옮기는 데 가상세계에서 내 영혼이 다칠까 걱정되어 날선 방패를 먼저 세우는 일”이며, 또한 “피눈물로 당신에게 나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통해 사람을 보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글이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숭고한 일”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니 글의 본론이 자신의 출생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필연이라 하겠다. 자신의 글 하나에 독립선언문만큼 비장하며 거대한 의미를 붙이는 이에게 자신이 태어난 순간은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엄홍식이라는 본명이 가진 뜻과 출생지와 가족 관계를 말하는 것부터 아버지가 ‘귀한 아들’을 그렇게 불러야 오래 산다며 ‘똥개’라고 불렀다는 에피소드까지 자신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사이에 “신체는 노화의 속도를 올리고 있지만 정신은 확장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것이 내 중2병의 당연한 실체다. 나는 항상 삶이 어렵다. 매 순간이 새것이고, 그 시간에 속한 모든 내가 새로운 나여서.”라는 자신에 대한 설명이 또 들어간다. 그가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또 말한 뒤다.



단지 글을 못 써서라고 할 수도 있겠다. 평소에 글 쓰는 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장황한 서론을 썼는지 모를 수도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을 밝히려면 “대구에서 누나 둘을 가진 막내아들이자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야 할 장남”이라는, ‘귀한 아들’의 위치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아인은 이 문장 뒤에 자신이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자랐고, “역할은 있었는데 ‘엄홍식’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는 “제수(祭需)를 차리느라 허리가 휘”었고, 누나의 이름은 할머니가 “딸 둘밖에는 없어서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엄방울로 지었다. 하지만 유아인은 이 차별에 대해 말하는 순간에도 기대받는 장남으로 컸던 자신의 부담감부터 말한다. 유아인이 “페미니스트가 아니고서 뻔뻔하게 살아갈 재간이 없”는 이유도 자신이 “‘엄마’라는 존재의 자궁에 잉태되어 그녀의 고통으로 세상의 빛을 본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페미니즘은 어머니와 누나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가족을 통해 여성의 차별을 인식한 대견한 페미니스트, 유아인의 페미니즘이다.

글 하나에 “신념과 사랑과 시대정신을 담아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고자”하는 나, 이렇게 소중한 나를 낳아준 “우리 엄마”는 “해방되어야 한다”는 인식. 유아인이 어머니와 누나가 당한 차별에 대해 “유난하고 폭력적인 그 풍경은 뻔뻔하게 펼쳐졌지만 자랑스럽게 대물림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유다. 제사를 지내야 할 장남이자 귀한 아들인 내가, 더 나아가 스스로를 “나의 귀함이 고작 ‘아들’이라는 ‘성’에 근거”하는 것을 경계하는 페미니스트가 말했다. 이런 내가 선언한 만큼 여성인 가족의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 그러나 여기에는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가족만 포함될 뿐, 사회 속의 여성은 없다. 또한 어머니와 누나, 더 나아가 가족 바깥의 여성들의 의견은 배제된다. 여성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주체의 의견이 빠진 페미니즘. 다시 말해 유아인이 허락한 페미니즘. 또는 가부장제 페미니즘이라 하겠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인정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만 페미니즘이라 정의한다. 그는 페미니즘을 “‘인간’과 ‘관계’와 ‘세상’에 대한 나의 이야기”와 “성가시게 유행하는 가상세계에서의 그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로 나눴다. 이 문장 앞뒤에는 “모든 아들딸들이, 모든 부모의 자식들이 다 귀하고 존엄하다”와 “‘차이’는 ‘차별’의 장벽이 되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가 있다. 문장만으로는 틀릴 것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유아인이 누나와 어머니를 이야기하면서 자신도 장남으로서 힘든 부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도 힘든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이 언급은 자신도, 또는 남자도 괴로울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효과를 만든다. 여자가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남자도 그럴 수 있다. 그러니까 여자든 남자든 차이로 인한 차별이 생기면 안 된다. 위 아 더 월드. 유아인이 보편적이고 당연한 말만 할수록 여자가 차이로 인해 차별받았던 역사와 현재의 현실은 지워진다. 남자와 여자 모두 “더 이상 ‘전쟁’하지 말고 ‘품앗이’하며 평화”를 찾으면 되는데, 여자의 차별만 강조할 필요가 있는가. 유아인은 그저 자신의 권리와 권력에 어떤 위협도 받지 않을 만큼 뻔해서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말들만 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성가시게 유행하는 가상세계에서의 그 ‘페미니즘’”이라고 주장한다.

유아인은 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그 정체성에 관한 사상과 운동에 대해 오직 자신만의 기준을 적용한다. 그 외의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 근거는 자신의 생각이 귀하고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추신처럼 덧붙인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힌 것처럼, 유아인이 그 글을 쓴 이유는 트위터에서의 싸움 때문이었다. 한 트위터 이용자가 유아인에 대해 “유아인은 그냥 한 20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기엔 좋은 사람일 것 같다. 친구로 지내라면 조금 힘들 것 같음. 막 냉장고 열다가도 채소 칸에 뭐 애호박 하나 덜렁 들어 있으면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나한테 혼자라는 건 뭘까?’ 하고 코 찡끗할 것 같음”이라고 쓰자 그는 자신에게 직접 보낸 멘션이 아님에도 여기에 대해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코 찡끗)”이라 말했고, 이것이 폭력적이라는 비판에 “그냥 한 말에 그냥 한 말씀 놀아드렸는데 아니 글쎄 한남이라녀(코 찡긋) 잔다르크 돋으시네요. 그만 싸우고 좀 놉시다”라고 받아치면서 ‘키배’(‘키보드 배틀’의 줄임말)가 시작됐다.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하든 사과하든, 이 ‘키배’에 대한 직접적인 입장을 밝히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하지만 유아인은 자신의 탄생으로부터 페미니즘, 전쟁, 가상세계 등을 언급하다 “‘기술 혁명’에 끌려가지 않고 당당하게 주도하며 ‘정신 혁명’을 이루자”며 “그것이 기술이 아닌 인류 진화의 열쇠”라 끝맺는다. 이 거대한 글 속에서 그가 트위터에서 했거나 받았던 발언들은 거론하기 너무나 사소해 보인다. 유아인은 싸움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에 거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유아인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아예 논의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21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여성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자격을 스스로 부여한다.

유아인은 페이스북에 글을 쓴 뒤 다시 트위터에서 “정상적 사고와 인격을 가진 모든 여성분들께 호소합니다. 부당한 폭도의 무리가 ‘여성’의 명예와 존엄함을 먹칠하는 현재의 상황을 방관하지 마십시오. 있는 힘을 다해 돕겠습니다.”라고 썼다. 누구든 자신에 대한 놀림, 비아냥, 인신공격 등을 당하면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일지라도 그에 대해 항의할 수도 있다. 직접 받은 멘션이든 검색을 해서 찾았든, 유아인이 자신에 대한 글에 의견을 밝히는 것은 그의 자유다. 그러나 유아인은 구체적인 부분들을 따지며 잘잘못을 가리면서 서로의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 여성에게 자신의 페미니즘과 “성가시게 유행하는 가상세계에서의 그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부당한 폭도의 무리”와 “정상적 사고와 인격을 가진 모든 여성분들”을, 여성의 “명예와 존엄함”의 기준을 스스로 내린 뒤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처럼 여성에게 말한다. 그리고 받아들여야 “돕겠”다고 한다. 자신의 기준에 맞으면 돕고, 그렇지 않으면 폭도가 된다.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그에게 자신의 비대한 자아를 꾸며주지 않는 페미니즘에는 어떤 가치도 없다.


그래서 유아인이 쓴 글은 페미니즘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의 글은 오히려 남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맨스플레인하는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부각시키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의 행동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숭고한 행동에 구체적인 잘잘못을 가리지 않는다. 대신 21세기의 세계 평화처럼 당장의 현실과는 아득히 먼 담론들을 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아인은 보편적인 정의와 가치를 말하고, 세상의 수많은 것들에 대해 말하는 대단한 사람이 된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그가 한 행동은 남자 상사가 술자리에서 여성 부하직원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는 것과 같다. 이 남자는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하며 자신의 성장사와 자신이라는 사람의 의미와 가치를 길게 말한 뒤, 자신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스스로 정의하고, 여성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길게 설명하면서 자신의 회고록을 더 길게 붙이는 남자의 페미니즘. 그 결과 공들여 쓴 글은 페미니즘의 대상이 돼야할 사람들과는 싸움을 반복하고, 오히려 그의 페미니즘에 대해 공감한다는 어떤 남자들에게 지지를 받는다. 이것이 유아인의 글이 가지는 가치일 것이다. 그는 지금 한국에서 남자가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쓸 때 하지 말아야할 모든 것들과, 그럼에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 등장하는 이유를 집대성해서 보여줬다. 참 대단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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