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터스톡
“그 프로그램 콘셉트가 ‘심야에 열리는 힐링 발레스쿨’이라면서요?” “하하하, 저처럼 킬링이나 안 하면 다행이죠!” 아픈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수업에 참석한 회원이 웃으며 말한다. 골반 부상으로 발레와 이별해야 했던 왕지원 씨의 아픔에 비할 순 없겠지만,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통증과 부상은 흔하다. 이들 대부분은 불편한 정장 차림으로 ‘예의’를 갖추고 책상에서 하루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눈치껏’ 사무실을 빠져나온 직장인. 만원 지하철에 부대끼며 겨우 학원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옷 갈아입기 바쁘니 저녁 식사는 언감생심이다. 수업 중 현기증을 느끼는 건 당연하고, 무리해서 동작을 해내다 피로를 감당하지 못한 관절이 이상 신호를 보내는 일도 잦다. 여유 있게 학원에 도착해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부드럽게 워밍업된 상태로 클래스에 들어가면 좋을 텐데 이게 말처럼 쉬운가.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 취미발레생의 소원은 백조가 되어보는 것도, 흰색 튜튜(발레용 스커트)를 입고 왕자에게 안기는 것도 아니다. ‘퇴근을 한 시간만 빨리 할 수 있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바람이다.
내 몸과 친해져 좋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죽일 놈의 발레”는 요구사항이 너무 많다. 아니 세상에, 오른발을 들면 그만큼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자연스러운데 절대로 기울어지면 안 된단다. 한쪽 다리를 뒤로 들면 상체가 앞으로 숙여지는 게 당연한데 다리는 많이 들되 상체는 조금도 숙이지 말란다. 신나게 점프를 하려면 후-욱 하고 숨을 몰아쉬게 마련인데 몸은 띄워도 횡격막이 부풀면 안 된단다. 이 모든 걸 신경 쓰다 보면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곧 선생님의 호령이 떨어진다. “여러분, 얼굴이 너무 무서워요! 좀 웃으면서 하세요!”
“저는 발레를 몸이 아니라 마음 때문에 해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일단 클래스에 들어가면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나와 발레’밖에 안 남잖아요. 그게 너무 좋아요.” 한 수강생의 이 고백은 매우 감상적인 이야기 같지만 동시에 상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제시하는 동작들을 수행하려면 날마다 조금씩 바뀌는 복잡한 콤비네이션을 빠르게 외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장님의 실적 압박이나 월세를 또 올리겠다는 건물주의 고약함 같은 건 생각할 틈이 없다. ‘앞으로 두 개 뒤로 두 개, 뒤로 두 개 앞으로 두 개 옆으로 세 개…’ 하면서 주문을 외듯 동작을 외운다. 그리고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이걸 머리에서 몸으로 옮긴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 ‘나와 발레’밖에 안 남는 순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방금 배운 그랑-제테(공중에서 다리를 앞뒤로 쫙 펼쳐 보이는 점프 동작)를 연습해보기도 한다. 그러고 있는 동안만큼은 ‘내일도 출근해야 함’을 잠시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