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그 뒷이야기… 환향녀와 이혼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7.10.21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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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68 – 환향녀 : 무책임한 지배층의 희생양

‘남한산성’, 그 뒷이야기… 환향녀와 이혼


패배한 역사를 다룬 사극은 영화든 드라마든 흥행하기 어렵다. 백제 멸망사를 담은 ‘계백’이 그랬다. 낙랑 애사를 그린 ‘자명고’는 또 어떻고. 그렇다면 조선 최대의 치욕을, 그것도 무겁게 조명한 영화 ‘남한산성’이 관객들의 발길을 끈 건 왜일까. 혹 산성 너머로 굽이굽이 현재에 이르는 길을 보았기 때문일까. ‘남한산성’,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로잡혀 간 부녀들은 비록 본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없다.” (인조실록)

1638년 3월 11일 실록의 사관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부녀자들에 대해 인정머리 없는 평을 남긴다. 이른바 ‘환향녀(還鄕女)’를 이혼시키느냐 마느냐, 논란이 분분한 때였다. 시집에서는 절개를 잃었다며 내치려 했고 친정 부모는 원통하다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선은 이 여인들에게 설 자리를 허락지 않았다.



병자호란은 임금이 남한산성을 나와 굴욕적으로 항복했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민간인 포로 50만 명! 청군이 철수할 때 잡아간 조선사람 숫자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으면서 심양에 이르렀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노비와 첩의 운명이었다. 몰래 조선으로 달아날 수도 없었다. 도망 포로는 청나라로 되돌려 보낸다는 게 항복 조건, ‘승자의 룰’이었으니.

“도망자 안단이라는 자가 북경에서 출발해 의주 관문에 이르렀는데 칙사와 의논하여 마침내 봉황성으로 압송하였다. 안단이 관문 밖을 나가자마자 크게 통곡하여 말하기를,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도 죽을 곳으로 보낸다’고 하였다.”

1675년 숙종 임금 때 어느 도망 포로가 겪은 일이었다. 잡혀간 지 38년 만에 호호백발이 되어 고국으로 탈출했건만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부르튼 발이 채 아물기도 전에 피눈물을 뿌리며 다시 끌려간 그이는 어찌 되었을까. 아마 발뒤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고 노비로 쓸쓸한 생을 마쳤을 것이다.


여성 포로들 가운데 상당수는 청군의 집에 첩으로 들어갔다. 전쟁터에 다녀온 남편이 첩을 데리고 오자 본처들이 가만둘 리 없다. 집집마다 모진 학대가 벌어졌다. 조선인 첩이 청군의 처에게 끓는 물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오죽하면 청태종 홍타이지가 본처들에게 엄포를 놓고 학대 금지령을 내렸을까.

포로들에게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오랑캐에게 복수하겠노라, 외치면서도 이들을 품어주지 못했다. 포로가 노비와 첩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누군가 몸값을 지불해야 한다. 문제는 일부 고관대작이 거금을 쓰는 바람에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식 몸값을 책정하려는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돌아온 포로들도 기막힌 현실에 부닥쳤다. 큰소리치다가 전쟁을 부른 지배층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유교 예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우고 어지러운 사회 질서를 다잡는다는 명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환향녀에 대한 이혼 요구와 사회적 냉대였다.

편견에 갇힌 사람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목숨보다 소중한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며 의혹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얼마나 서러웠을까? 전쟁 중에 수많은 여인들이 자의반 타의반 자결했다고는 하나 모진 삶을 이어가고자 한 것이 어떻게 죄란 말인가. 그것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꼴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은 바로 그 책임의 문제를 결말부에 거론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살아야만 걸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있다. 그 길은 책임지지 않는 낡은 것들이 모두 사라져야 비로소 열린다. 여기에는 인조 임금도, 주화파 최명길도, 척화파 김상헌도 예외가 없다. 희망은 오로지 백성에게 있다. 극중 대장장이 서날쇠가 말한다.

“우리 같은 백성들은 임금이나 사대부들이 명나라 황제를 섬기든, 청나라 황제를 섬기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곡식을 거둬 한겨울에 배곯지 않기만 바랄 뿐입죠.”

그럼 어제는 임금이 얼어붙은 강을 건너게 돕고, 내일은 곡식을 얻기 위해 청군을 안내하려는 늙은 뱃사공에게 나라는 어떤 의미일까. 전쟁과 오랑캐는 무섭지만 추위와 굶주림도 호되다. 고단할망정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또 그래야 사랑하는 손녀를 돌볼 수 있다. 그 소박한 삶을 한 발 앞서 들여다보고 챙겨주는 게 좋은 나라다.

스포츠에서 팀의 미래가 보이지 않으면 리빌딩(rebuilding)을 단행하는 것처럼, 나라도 낡은 틀을 뜯어내고 다시 세워야 할 때가 있다. 전란과 같은 큰 위기는 재건의 기회이기도 하다. 백성이 살아야만 걸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거기서 출발한다.

하지만 조선은 리빌딩의 기회를 거듭 놓쳤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연이은 역모사건과 궁궐공사에 휘둘려 허송세월 했고, 병자호란 뒤로는 헛바람이 들어 조선중화니 유교예법이니 따지다가 그르쳤다. 그나마 가진 사람은 세금 많이 내고, 없는 사람은 적게 내는 대동법을 추진했지만 전면시행까지 100년이나 걸렸다.

환향녀는 거꾸로 낡은 유교윤리와 신분질서를 옥죄려는 지배층이 나라를 망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제단에 올린 희생양이었다. 남한산성의 겨울만 모질고 깊었을까. 전란 후에 휘몰아친 백성들의 겨울도 못지않았다. 물론 겨울이 깊다는 건 봄이 멀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진 겨울을 견딘 자는 끝내 봄을 맞는다. 영화도 그렇게 이야기를 맺고 싶어 한다.

모름지기 영화는 재미있어야 하는데 ‘남한산성’은 불편하다. 말 많고 골치 아프고 넌더리가 난다. 그럼에도 맴도는 여운이 가시지 않으니 문제다. 그 전쟁은 끝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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