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과 김상헌, ‘남한산성’이라는 저울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2017.09.2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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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극 속 역사인물 67 – 최명길과 김상헌 : 화친이냐 전쟁이냐

최명길과 김상헌, ‘남한산성’이라는 저울


이조판서 최명길이 화친을 위한 국서를 수정했는데, 그 글을 본 예조판서 김상헌이 통곡하면서 찢어 버리고 인조에게 아뢰었다.

“예로부터 적군이 성 아래까지 이르면 그 나라와 임금을 보존하기 어려웠습니다. 한번 성문을 나서게 되면 북쪽으로 끌려가는 치욕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국서를 찢어 이미 죽을 죄를 범하였으니, 먼저 신을 처벌하고 다시 더 깊이 생각하소서.”(인조실록)

1637년 1월 18일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일이다. 임금의 명으로 작성 중이던 국서를 신하가 찢어버리다니! 그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를 계기로 김상헌은 ‘척화(斥和)’의 상징으로 떠오르며 선비들에게 의로운 인물로 칭송받았다. 반면 나라를 구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인 최명길은 ‘소인(小人)’으로 몰렸다.



“전하, 백성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영화 ‘남한산성’에서 극중 최명길이 임금에게 부르짖는다. 역사를 보면 1636년 2월 후금 사신을 내치고 국교를 끊으면서 조선은 척화 열풍에 휩싸였다. 하지만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전쟁 준비에 착수하자 공포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싸우자면서도 확신이 없고, 대화를 모색하고 싶지만 비방이 두렵다. ‘말로만 척화’의 어이없는 실상이었다.



이때 선비들의 ‘고상한 큰소리’를 헤집고 국익을 위해 고군분투한 인물이 바로 최명길이었다.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그는 ‘주화(主和)’의 입장이었지만 무턱대고 화친만 주장하지는 않았다. 꼭 전쟁을 치러야 한다면 전방에서 결전을 벌이고 후방의 손실은 최소화하자는 방안도 제시했다. 최명길의 소신은 나라와 백성을 살리려는 공직자의 책임감에서 나왔다.

“오랑캐가 휘몰아 오는데 체찰사는 강화도로 들어가 지키고, 도원수는 정방산성에 물러가 있으면 청천강 이북의 여러 고을은 버려져 도적에게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 되면 많은 사람이 죽고 종묘와 사직이 파천하게 될 것이니, 누가 책임을 지겠습니까.”(인조실록)

그러나 인조와 척화파 조정은 ‘천험의 요새’ 강화도만 믿고 있었다. 오랑캐 군대는 바다를 건너지 못하기 때문에 섬에서 버티면 된다는 안일한 믿음이었다. 안주, 평양, 개성에 주둔한 조선 수비군도 요충지를 버리고 외딴 산성에 들어가게 했다. 지구전을 벌이면서 반격의 기회를 잡겠다는 것. 그들의 전쟁 계획에는 적에게 무방비로 노출될 백성이 없었다.


결국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14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었고, 철기 선봉대는 아무도 막지 않는 대로를 질주해 5일 만에 한양에 나타났다. 강화도로 가려고 대궐을 나서던 인조는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생겼다. 활로를 뚫은 인물은 최명길이었다. 화친을 청하겠다며 홀로 적장을 찾아가 기세를 늦춘 것이다. 그가 목숨 걸고 시간을 번 덕분에 임금과 조정은 겨우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이에게 돌아온 것은 척화파의 호통이었다.
“최명길이 말하는 삶은 곧 죽음입니다. 전하, 정녕 칸의 신하가 되려 하시옵니까?”

영화 ‘남한산성’이 재해석한 김상헌의 뜻은 여기에 있다. 당시 나라의 운명은 얼어붙은 산성에 갇혀 있었다. 청나라 군대는 이중삼중 포위망을 구축하고 양동작전을 펼쳤다. 한편으론 대포를 쏘며 성을 겁박하고, 또 한편으론 사신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김상헌을 위시한 척화파는 화친을 입에 담지 않으려 했다.

유학자들에게는 뜻을 빼앗기는 것이 곧 삶을 빼앗기는 것이었다. 명나라 천자를 배신하고 오랑캐 칸의 신하가 됨은 곧 자식이 부모를 저버리는 일과 같다. 천륜과 도리를 잃은 인간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최명길이 작성한 화친 국서도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문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에게 근본적인 살 길은 차라리 의롭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었다.

북쪽으로 끌려갈까봐 두려움에 빠진 인조는 화친과 결전의 갈림길에서 망설였다. 최명길은 일단 종사를 보존한 다음 ‘와신상담(臥薪嘗膽)’을 기약하자고 임금을 설득했다. 김상헌이 제동을 걸었다. 성에서 강하게 버티면 구원병이 당도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러나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조선군은 분전했지만 지휘체계가 없어 각개 격파당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왕실과 고관의 가족이 피신한 강화도마저 적들에게 넘어갔다.

1637년 1월 30일 식량이 다 떨어지자 인조는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해야 했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의 치욕보다 더 끔찍했던 것은 잠실벌에 메아리 친 백성의 절규였다. 오랑캐에게 붙잡힌 민간인 포로들이 궁궐로 돌아가는 국왕을 바라보며 이렇게 울부짖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인조실록)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50만 명에 이르렀다. 최명길은 포로 귀환에 앞장서는 등 전후 수습을 주도했다. 명나라와의 전쟁에 조선군을 파병하라는 요구도 그가 무마했다. 심지어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죄로 심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그곳에서 먼저 잡혀와 있던 김상헌과 오해를 풀고 우정을 나눴다는 후일담이 전한다.

두 명의 충신, 서로 다른 신념! 영화 ‘남한산성’이 내건 카피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차이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정적의 우정 또한 아름답다.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역사의 시선은 엇갈린다. ‘고상한 큰소리’를 숭상한 조선에서는 김상헌이 빛나는 이름을 얻었지만, 오늘날의 현실적인 기준으로 보면 최명길의 ‘유능한 책임감’이 끌린다. 역사의 평가는 움직이는 것이다. 저울의 눈금이 바뀌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이라는 저울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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