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연인·동료의 잇따른 죽음에도 빛난 파격과 우아함의 연주

머니투데이 제천(충북)=김고금평 기자 2017.08.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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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에서 만난 재즈] ①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

편집자주 현대 대중음악은 상당 부분 재즈에 빚지고 있다. ‘낯설고 어려운’ 음악이라는 재즈에 대한 선입견이 클수록 재즈가 부리는 화성의 매력, 코드의 전환, 리듬의 향연에서 ‘베끼지 않으면 안되는’ 복제의 유혹도 넘쳐난다. 시대가 변해도 꾸준히 사랑받고 전설로 회자된 3명의 아티스트를 제13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만났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 재즈 보컬리스트 그레고리 포터가 그 주인공이다. 대중성보다 예술에 더 가까운 이들의 음악과 삶을 들여다봤다.

영화 '기억된 시간 : 빌 에반스'. 영화 '기억된 시간 : 빌 에반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는 지적 음악인의 대표 주자다.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초상화 한 장만으로도 그가 어떤 뮤지션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수려한 용모만큼 예쁜 멜로디를 구사할 것 같고 안경 너머 세계엔 학구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듯하다.

실제 그의 연주도 그랬다. ‘재즈계의 쇼팽’으로 불릴 만큼 선율 대부분이 낭만적이고, 나인(9) 코드로 구사한 재즈 화성은 유려하고 우아했다. 동료 뮤지션은 이렇게 얘기한다. “표현력 하나는 타고난 사람”이라든가 “화성이 깨진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식이다.



재즈의 혁명가로 불리는 마일스 데이비스 팀에 합류한 것만으로도 그의 실력은 이미 증명된 셈이었다. ‘재즈=흑인 음악’이라는 깨지지 않는 공식 앞에, 그것도 마일스 데이비스 퀸텟이라는 걸출한 팀에 백인인 에반스가 처음 합류한 사건은 미국 흑인 음악계에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 중 하나였다.

리듬감 넘치고 빠르게 치던 비밥 중심의 재즈에서 에반스는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혁명의 불을 지폈다. 빨리 치는 게 통했던 시대에 느리고 아름다운 연주가 이목을 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 마일스 데이비스의 명작 ‘카인드 오브 블루’(Kind of Blue)의 절반의 성공은 에반스의 몫이었다.



음악적 성과와 재능과 달리, 그의 인생은 ‘블루의 연속’이었다. 내성적인 성격과 대중 앞에 부끄러움을 타던 부족한 자신감을 달래줄 위안으로 의지한 마약은 그의 삶 전체에 드리웠다.

마일스 데이비스 팀을 나와 꾸린 빌 에반스 트리오 시절, 에반스가 가장 의지하고 믿었던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어릴 때부터 신앙처럼 여기던 형의 자살, 10년 이상 관계를 유지한 연인을 버린 대가로 얻은 연인의 자살 모두 그의 인생에서 빗겨갈 수 없었던 불행의 파고였다.

하지만 50세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에반스의 음악적 성취는 눈이 부실 만큼 빛났다. 팝 가수 토니 베넷이 에반스와 듀엣 앨범을 제작하면서 느낀 소회는 이랬다. “에반스가 녹음한 연주를 가져왔는데, 듣고 나서 깨달았죠. 제 인생 최고의 음악수업이었다는 걸.”


올해 91세인 베넷에게 새로운 삶의 모토가 된 문구가 있다. 에반스가 들려준 간결하고도 잊을 수 없는 한마디다. “진실과 아름다움을 좇고 나머지는 다 잊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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