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길위의 편지]곰소염전에 가다

머니투데이 이호준 시인·여행작가 2017.08.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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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곰소염전의 석양./사진=이호준 작가곰소염전의 석양./사진=이호준 작가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보통 곰소라고 부르는 곳으로, 부안읍에서 서남쪽으로 60리 정도 떨어진 바닷가 마을이다. 원래 염전으로 유명했지만 최근에는 지척에 있는 젓갈단지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대처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젓갈을 사러 올 정도다. 나는 염전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석양이 좋아서 가끔 찾아온다.

오늘은 일진이 썩 좋지는 않은 날인 것 같다. 날씨 정보를 확인하지 않고 길을 떠난 탓이다. 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었으니, 염전으로서는 반갑지 않은 날씨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염부는 보이지 않는다. 오늘따라 바람도 마뜩치 않다. 그래도 결정지에는 막 엉기고 있는 소금이 둥둥 떠다닌다. 염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염창(소금창고)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맑은 하늘이든 염부든 기다려볼 심산이다. 이곳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타래 풀 듯 뻗어 나간 수로들이, 바다가 부풀어 오르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염분 가득 머금은 바닷물을 데려 올 것이다.



바닷물을 가둬두면 소금이 저절로 생기는 줄 알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긴 기다림과 숱한 땀이 필요하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수문을 열고 바닷물을 저장지에 가두는 일부터 시작한다. 저장지의 바닷물은 곧 증발지로 가고 1차 증발지에서 어느 정도 졸여진 소금물은 또 2차 증발지로 보내진다. 갈수록 수분이 증발하면서 염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2차 증발지를 거쳐 염도가 정점에 오른 바닷물은 마지막으로 결정지에 도착한다. 볕이 좋은 날 새벽에 결정지로 들어간 소금물은 하루 종일 졸여져 저녁 무렵이 되면 하얗게 엉기기 시작한다. 이걸 일러 소금 꽃이 핀다고 하는 것이다.

소금 꽃은 홀로 피어나는 게 아니다. 햇볕은 물론 적당한 바람과 염부의 땀과 시간을 품어야 피는 꽃이다. 염전에서는 바닷물만 졸이는 게 아니라 시간도 함께 졸인다. 시간의 정수(精髓)가 순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좋은 소금을 만들기 위한 염부의 일상은 고단하다. 별이 지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바닷물과 씨름한다. 염부의 몸이 까맣게 탈수록, 더욱 하얗고 맛좋은 소금이 태어나는 것이다. 비라도 내리면 염부들은 마음까지 까맣게 탄다. 애써 조린 소금물에 빗물이 섞이면 만사 헛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노심초사해도 바닷물을 열 말 가두면 한 되의 소금밖에 안 나온다고 한다. 시인 함민복은 그의 시 <긍정적인 밥>에서 소금 한 되를 300원에 불과한 ‘싸구려 인세’에 비했지만, 시도 소금도 눈물겹게 귀한 존재다. 우리는 소금 속에 담겨 있는 열 말의 바닷물도 기억해야 한다. 소금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곰소염전 결정지에서 소금이 막 엉기고 있다./사진=이호준 작가곰소염전 결정지에서 소금이 막 엉기고 있다./사진=이호준 작가
그 많던 염전도 보기 어려워진지 오래다. 소금의 질이 좋기로 소문난 곰소염전도 새우양식장으로 둔갑하고 80ha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싼값으로 무장한 중국산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사양길의 염전들, 오래 묵은 존재 특유의 진득함으로 시대의 격랑에 맞서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게 안타까워서 저무는 염전에 오랫동안 시선을 담가두고 있다.

염부는 끝내 오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파질이 들어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건 포기한지 오래지만, 이런 기다림의 시간은 쌉쌀하면서도 달콤하다. 누군가 내 기다림을 헤아린 걸까?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마치 이불 개듯 차곡차곡 구름을 걷어내기 시작한다. 저녁때가 다 돼서 무슨 조화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선다. 기다림은 이렇게 예기치 않는 행복을 주기도 한다. 갈라진 구름 사이로 벌건 해가 얼굴을 내민다. 고대하던 석양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결정지에서 혼자 자맥질하는 저녁 햇살이 아깝지만, 지금은 일을 하는 시간이 아니다. 저녁나절의 햇볕은 바닷물을 졸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면서 염전에도 황금빛 주단이 깔리기 시작한다. 저만치 서 있던 산 그림자가 뚜벅뚜벅 걸어와 키를 부풀린다. 먼 산들은 자꾸 제 모습을 지워가고 붉은 해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어느 순간 공기가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붉은 덩어리가 툭, 하고 떨어진다. 기다렸다는 듯이 맹렬한 공복이 전신을 훑는다. 돌아갈 시간이다.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곰소염전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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