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소통’ 아닌 ‘쇼통’ 정부라는 비꼼이 따라붙는다. ‘보여주기(show)’에만 능하다는, 내용은 없다는 비판이다. 난 솔직히 이 비아냥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쇼통’이 놀랍고 무섭다.
청와대 경호실장은 문 대통령에게 교포들이 회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상황을 설명한다. 차에 타기 전 손 한번 흔드는 정도의 반응을 기다린 보고였다. 문 대통령은 아예 교민들이 모인 곳으로 갈 마음을 먹는다. 그리곤 메르켈 총리에게 양해를 구한다. 메르켈 총리는 “그들도 독일 국민”이라고 말한 뒤 문 대통령과 동행한다. 문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 경호실장 모두 ‘느낌적인 느낌’으로 소통을 고민한다. 그 결과 멋진 ‘쇼통’이 만들어진다. 여기까진 새롭고 놀랍다.
박근혜 정부때 설치된 문서 감지기 철거 장면은 페이스북 동영상으로 국민 모두가 접한다. ‘청와대→보도자료→브리핑→기사→독자’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대선 때부터 그랬다. 현안에 대한 입장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올렸다. 마크맨들에게 휴대폰 전화통화보다 페이스북 ‘새로고침’이 더 중요한 업무였다. 지금 청와대 출입기자들도 마찬가지다. 청와대 일과가 끝날 전해지는 문재인 펀드 청산 뉴스, 문 대통령의 반려견 소식 등은 공식 브리핑이 아닌 페이스북에서 듣는다.
다양한 플랫폼은 국민과 직접 소통을 꾀하는 문재인 정부에게 축복이다. 사실 대국민 직접 접촉을 원했던 것은 참여정부다. 언론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다. ‘청와대 브리핑’을 만들었고 청와대 수석을 비롯 참모진들은 그곳에 장문의 글을 썼다. 논리적 반박, 이성적 설득을 했다며 자화자찬했고 자족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적을 설득할수록 적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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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지금은 다르다. 언론을 불신하지도, 그렇다고 신뢰하지도 않는다. 특정 언론에 대한 ‘빚’도, ‘악감정’도 없다. 있는 그대로 대한다. 언론을 활용하거나 이용하겠다는 개념도 없다. 기존 언론의 ‘활용’, ‘이용’을 위해 ‘홍보’가 구시대의 접근이었다면 지금은 ‘소통’이 필요했다고 본 것이다.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다양하게 ‘소통’하고 ‘쇼통’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다양한 소통을) 이제 조금씩 시작하려 한다”고 했다. 지금의 ‘쇼통’은 시작도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무섭다. 정작 언론은, 우리는 촛불 이후 ‘주권자 국민’보다 여전히 정권과 ‘관계’에만 주력하는 것은 아닌지…. 국민과 소통은커녕 계몽이라는 과거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게 아닌지…. 언론인으로서, 답답하고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