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7주년] "죽음도 지나쳐야 했어…전쟁? 설명하기 힘들어"

뉴스1 제공 2017.06.24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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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군인들이 전하는 생생한 전쟁 이야기
건국대 한국전쟁체험단 조사팀, 기록물 발간

(서울=뉴스1) 권혜정 기자 =
(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2016.6.23/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월드피스자유연합 제공) 2016.6.23/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하늘을 갈기갈기 찢는 소리. 땅이 터져오르는 피분수. 버섯구름 폭발해 퍼지는 냄새. 살점 흐트러지는 비명. -절박한 순간 육이오 전쟁 속에서(유소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총성과 포성 소리, 코 끝에서 번지는 피비린내. 아스라한 기억으로 사라질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당시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6·25한국전쟁은 올해로 67주년을 맞았지만 참혹한 전장 속에서 고스란히 전쟁을 치러낸 참전용사들은 여든이 훌쩍 넘은 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기억을 생생히 지니고 있었다.



건국대학교 신동흔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은 '한국전쟁체험단 조사팀'은 지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각지를 떠돌며 300여명의 한국전쟁 체험가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듣고 모았다. 이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해군으로, 해병대로, 경찰로, 육군으로 전쟁을 치러낸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다.

◇"전쟁은 예고 없이…" 해군·해병대 참전용사의 기억




방성배 할아버지. (건국대 한국전쟁체험단 조사팀 제공) © News1방성배 할아버지. (건국대 한국전쟁체험단 조사팀 제공) © News1
"40일을 겨울 바다 위에서 보낸다는 것은 거의 지옥이야. 40일을 바다에 갔다 오면 육지에서 20일 동안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어."

인천에서 태어난 방성배 할아버지(83)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포로 피난을 떠났다. 그러나 더이상 남쪽으로 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피난길이라는게, 요즘 영화에서 보는 것 같이 길에서 사람이 죽어도, 애가 죽는 것을 봐도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참혹한거야. 전쟁, 그거 설명하기 힘들어"라고 당시의 처참했던 피난 경험을 들려줬다

해군에 입대한 방 할아버지는 당시 가장 큰 함선이던 '두만강호'에 승선해 주로 동해상에서 해상 임무를 맡아 치렀다. 입대 당시 학생 신분이던 그는 그렇게 휴전되는 날까지 전장에 있었다. 방 할아버지는 "참전하는 것이 학생의 도리라고 생각했지"라며 "학생들은 그냥 나 하나 죽어서 나라에 보탬이 된다면 하는 마음이었어. 나도 그랬고, 다 그랬어"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방 할아버지는 특히 해군에 입대한 이유에 대해 "삼면이 바다인 나라에서 육지는 이미 (적군에) 장악된 마당에 바다로 쫓아 올라가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지"라며 "육지에서 싸우는 것보다 바다에서 싸우는게 낫겠다 싶어서"라고 설명했다.

방 할아버지는 그렇게 한번 출항하면 20일에서 40일까지 바다에서 보냈다고 했다. 부식이 떨어지면 오가다 만나는 미군 배에서 얻어 먹기도 했다. 천안함보다 규모가 조금 더 큰 두만강호에는 자그마치 310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67년전의 기억임에도 정확하게 숫자를 기억하고 있던 방 할아버지는 "전투 승무원으로 완전히 채운거지"라고 말했다.

전쟁이란 것이 그렇지만, 해상은 특히나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었다고 했다. 방 할아버지는 "전투에는 예고라는 게 없잖아. 갑자기 상황이 벌어지면 배치되고, 전투하고, 대포 쏘고 하는 거다"라며 "해상에 전투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고, 기뢰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거니까. 잠수함 같은게 보이면 폭뢰를 떨어뜨리고 기뢰가 보이면 보고하고, 항상 전투태세였다"고 회상했다.

가장 위협적이었던 것은 적이 설치한 기뢰였다고 한다. 방 할아버지는 "원산이나 흥남 근처에 가면 오랜 기뢰들이 많았어"라며 "제대로 걸리면 큰 배 하나가 그냥 날아가는거야"라고 전했다. 그는 동기가 탔던 704배를 언급하며 "동해에서 경비 중에 배가 없어졌는데, 살아 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라고 했다. 기뢰에 배가 공격을 받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는 전쟁 통에 배 위에서 40일 가까이를 보냈다고 했다. 방 할아버지는 "40일을 겨울 동해 바다에서 지낸다는 것은 지옥이야"라며 "40일을 갔다 오면 20일은 육지에 있어도 배가 흔들리는 것처럼 땅이 막 흔들려"라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1953년 휴전 협정이 맺어졌을 때 석도와 초도, 연평도, 백령도 등 섬에서 민간인을 실어 나른 이야기도 꺼냈다. 1000명이 넘는 사람이 배에 탔고, 배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여자부터 하나하나 말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방 할아버지는 "다 기록에 남겨 놓을 수는 없는거겠지만, 한국전쟁에는 질서가 없었어"라며 "의욕 하나로만 이뤄진 것. 계획이나 이런 것들이 전혀 없던 전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끔 (안보에 대해) 넋빠진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요즘 사람들이 안보에 대해서 조금만 더 심각하게 생각해줬으면 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방 할아버지와 달리 해병대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던 이도 있다. 이용배 할아버지(85)는 항상 최전방에서 싸우던 사람이었다고 본인을 소개했다. 그는 "인천에 상륙해서 서울을 탈환하는데 내가 선발로 나갔어. 태극기를 꽂은 사람이 바로 나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당시 내 소속이 해병 1사단, 1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 1분대였지"라며 "그래서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중앙청사를 탈환하는데 내가 선발이었던거야"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휴전선의 김일성 고지, 모택동 고지를 내가 혼자서 빼앗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1951년 전장에서 머리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할아버지는 나이가 들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전투에 제일 앞서 싸우다 고지 전투 중 부상을 당했고 큰 수술 후 겨우 살아났다고 했다. 전역하며 화랑무공훈장도 받은 할아버지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는 결국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 곁을 지키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누워서만 지내는 현실을 언급하며 "역사라는 것이 없어질 수 없는 거 아니냐. 죽어서도 역사는 있는 것인데, 60여년 전이라고 역사가 없어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전쟁의 상흔을 잊고 사는 현 세태를 한탄했다.

탄피 자국을 보여주던 할아버지도 "우리가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이제와 직무를 달라는 것도 아니다"라며 "그저 이름만이라도 기억해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 기록에 이용배라는 사람이 온전하게 남아야 후대를 양성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안타까워 했다.

◇전쟁보다 무서웠던 배고픔…"이틀 굶어봐 못먹을게 없어"

육군에 입대해 한국전쟁을 치렀던 유지춘 할아버지(88)는 "전쟁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배고픈 설움이야"라고 입을 열었다. 유 할아버지는 '군에 입대하면 죽는다'라는 말에 6번이나 입대를 연기했다고 했다. 그는 군에 입대하기 싫어서 검지를 자르는 사람이 있었다며 "돈 있는 사람은 전장에 안 가고, 돈 없는 사람만 가는거야. 만만한 사람만"이라고 회상했다.

딸린 식솔에 대한 걱정 때문에 유 할아버지 역시 입대를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썼다. 일부러 옻을 몸에 문지르는가 하면 마늘에 발을 비벼 독이 올라오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결혼한 다음날, 부인과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군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군에 입대한 후 가장 무서운 것은 포성도, 총성도 아닌 '배고픔'이었다. 굶기를 밥 먹듯, 이틀까지도 굶어봤다는 할아버지는 "밥을 먹기라도 하면 일 분 내로 끝내라는데, 어떻게 밥을 먹겠나"라며 "뭐니뭐니해도 배고픈 게 제일 서러웠다"고 전했다.

배고픈 병사들은 새벽 보초를 설 때 산에서 칡뿌리를 캐 먹기도 했다. "칡뿌리를 많이 먹으면 몸이 막 부어. 독이 있는건지"라던 할아버지는 버드나무 땅버들은 물론 이름 모를 풀도 무작정 입에 넣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이틀을 굶어봐. 못 먹을게 없어"라고 씁쓸해 했다.

◇"서울 공원마다 시체 산더미처럼 쌓여"


이영근 할아버지. (건국대 한국전쟁체험단조사팀 제공) © News1이영근 할아버지. (건국대 한국전쟁체험단조사팀 제공) © News1
경찰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이영근 할아버지(88)는 전쟁 발발 하루 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일요일이었지. 대낮에 비행기가 돌면서 방송을 하더라고. 외출한 군인들 전부 복귀하라고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방송 후 불과 이틀이 지난 서울은 그야말로 '불바다'였다고 기억했다.

피난을 겪다 경찰에 자원한 그는 여전히 부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201대대'에 배치 받은 그는 열차를 타고 북한으로 향하기 전 훈련을 받을 당시를 회상하며 "9·18 서울 수복 쯤에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데, 장충단 공원에 인민군부터 민간인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더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 시내 공원마다 시체가 없는 곳이 없었다"고 참혹했던 당시를 떠올렸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전 육군에 입대한 원청의 할아버지(85)는 전쟁 당시를 묻는 질문에 무서울 정도로 엄격했던 중대장을 기억해냈다. 그는 "중대장이 얼마나 엄격했는지, (적군의) 귀를 베어 가든, 목을 잘라가든 (뭐든) 가져가야 했다"고 회상했다.

60여년이 훌쩍 넘어 중대장의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다던 할아버지였지만 전쟁 당시 상황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그는 당시 참혹했던 상황에 대해 "200~300명이 전투에 나가면 가나마나"라며 "가면 죽어 내려오는 거야. 죽으면 그냥 내버려 두고, (사람들이) 안 내려오면 벌써 죽어서 송장이 된거지"라고 말했다.

원 할아버지는 아군의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그대로 방치했던 기억을 어렵게 꺼내 놓으며 "옛날 군대 생활하던 생각을 하면 자꾸 눈물이 나와"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데 말하면 뭐하겠어. 젊은 사람들에게 들려줘도 다들 거짓말로 아는데. 소용 없는 일이야"라고 씁쓸해 했다.

한편 이번에 발간된 10권의 '한국전쟁 이야기 집성'에는 총 162명의 전쟁 체험 사연이 담겨 있다. 3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방대한 작업을 진행한 신동흔 교수는 "160여명이 넘는 역사의 산 증인들이 펼처낸 생생한 한국전쟁 이야기들은 그간 공식적으로 역사를 통해 알려진 것과 다른 차원의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이라며 "제보자들의 분투와 고난을 잊지 않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훌륭히 열어나가는 것이 우리의 몫일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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