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내인이다 | ① 발뮤다 공기청정기, PS4, 넷플릭스의 삼위일체

이지혜 ize 기자 2017.05.2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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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내인이다 | ① 발뮤다 공기청정기, PS4, 넷플릭스의 삼위일체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무섭다. 아무리 파란하늘에 볕이 좋아도, 자전거를 타기엔 미세먼지가 심하다. 출근길은 그냥 지옥이다. 아침 9시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직장에 가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게다가 이제 아침에는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며 KF등급까지 꼼꼼히 살피면서 마스크를 착용하기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밤에는, 여성이라면 으슥한 밤거리를 뛰어서라도 빨리 지나치고 싶어진다. ‘이불밖은 위험해’란 말은 그냥 이불 속에서 자고 싶단 엄살이 아니다. 바깥은 정말 위험하다. 심지어 돈도 많이 든다. 그래서였다. 언젠가부터 집에 내 삶을 지키는 마법진, 발뮤다-플레이스테이션4(이하 PS4)-넷플릭스를 설치한 것은.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면 목욕재개로 속세의 미세먼지로 찌든 몸을 씻어낸다. 그리고 집밖에서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주는 가신(家神), 발뮤다 공기청정기를 튼다. 사기 전까지는 망설였다. 혼자 사는 집, 더 이상 무엇을 들일 공간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집에 있어도 눈이 따가웠고 잠을 자고나면 코가 막혔다. 이런 증상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건 발뮤다를 사고 난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때 깨달았다.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그리고 요즘엔 그러려면 ‘아이템빨’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세먼지가 지금도 내 폐로 들어오고 있는 세상에 단지 청소를 깨끗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성능 좋은 공기 청정기가 필요했다. 만족할만한 삶의 질은 이제 집에 무언가를 계속 들여놓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됐다.



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라, 그것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은 하나의 신앙이 됐다. 혼자 제대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을 돌봐야 하고, 나를 돌보는 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청소, 빨래, 설거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위생이 나빠지고 면역력이 떨어진다. 혼자는 즐겁지만, 혼자만의 고통은 두렵다. 1인 생활의 년차가 늘어갈 때마다 내 몸을 걷어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은, 오직 노동을 할 수 있는 상태일 때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망설이던 PS4도 질렀다. 삶의 질은 신체의 안정만으로 귀결되지 않으므로. 무엇보다 PS4는 혼자 할 수 있는 게임이 많았다.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욕설과 갖은 혐오표현을 들으며 다시는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PS4를 사고 오픈 RPG ‘호라이즌 제로 던’을 싱글 플레이로 하면서, 삶의 재미를 되찾을 수 있었다. 차별 받는 여성이 차별을 이기고, 세상을 구하는 과정은 기계생명체를 잡으며 전투를 하는 일보다 더 즐거운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누구도 뭐라하지 않는 세계 안에서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발뮤다 공기 청정기를 들여놓으면서 집에 있는 것이 쾌적해졌고, PS4를 사니 집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템들이 들어간 집은 바깥보다 편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는 엔터테이닝의 공간이 됐다. 그리고 퇴근 후 약속을 점점 안 잡기 시작했다. 매일 일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발뮤다 공기청정기를 켜놓고 PS4의 패드를 잡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보니 큐브 같은 원룸에 애착도 생겼다.

넷플릭스는 집 안의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마법이었다. PS4를 사고나서 계정이 있으면 넷플릭스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게임을 하다 쉴 때 조금씩 봤다. 하지만 어느 순간 넷플릭스 신작들을 보고, 유튜브 채널들을 구독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아이디를 입력하면, 다른 연동 없이 게임을 하다 구독을 추가해놓은 이사베의 화장법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넷플릭스에서는 한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정치 드라마들을 볼 수 있었다. ‘지정생존자’는 힐러리가 아닌 트럼프가 당선된 현실을 위로해줬으며, 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해서 인수인계 없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업무를 바로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의 상황을 그려볼 수도 있었다. 요즘에는 마블의 드라마 시리즈 ‘데어데블’, ‘제시카 존슨’에 이어 소설 ‘빨간머리 앤’을 드라마로 만든 ‘앤’을 보고 있다. 앤은 그가 아동학대에 시달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마릴라는 페미니즘 공부를 하며, 조세핀은 레즈비언이다. 당장 국내 TV 프로그램만 보면 진부한 작품들,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은 온갖 프로그램들이 나온다. 넷플릭스는 이런 프로그램들의 방공호 같다. 그리고 이제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바깥에 나가고 싶지 않다. 미세먼지와 적들만 가득한 온라인 게임과, 위험한 발언들이 난무하는 TV 프로그램들의 세계는 이제 안녕이다. 발뮤다 공기청정기를 틀어놓고, PS4를 하다 넷플릭스를 보는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생활은 꽤 만족스럽다. 그러니 이제 선언을 해야겠다. 나는 실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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