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3000명 '야쿠르트 아줌마'는 왜 법적 근로자 아닐까

머니투데이 김만배 기자, 이태성 기자, 양성희 기자, 한정수 기자, 김종훈 기자, 이경은 기자 2016.08.27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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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살롱<130>]회사 지휘·감독 받지 않아 불인정…"기계적 판결" 비판도

1만3000명 '야쿠르트 아줌마'는 왜 법적 근로자 아닐까


"앞으로 길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를 만나면 '야쿠르트 사장님, OOOO 한 병 주세요'라고 말해야겠다."



지난 24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달군 글입니다. 이날 대법원은 이른바 '야쿠르트 아줌마'로 불리는 위탁판매원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는 첫 판결을 내렸습니다.

근무시간 등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회사의 지휘·감독을 받는 근로자로 보기 어렵다는 취지입니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고, 그날 판매할 제품의 종류와 수량을 회사가 아닌 판매원이 스스로 정하는 사정 등이 고려됐습니다.



이는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했는지 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그간 판례에 따른 것인데요. 고용 형태가 다양해진 시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고 대법원이 지나치게 기계적인 판결을 내렸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퇴직금 달라고 소송냈지만 패소…출퇴근 시간, 수수료 지급 등 근무조건 어땠나

야쿠르트 아줌마를 근로자로 인정하지 않은 법원의 판단은 1·2심에서 상고심에 이르기까지 동일합니다. 야쿠르트 아줌마로 일했던 정모씨는 퇴직금 지급 청구소송을 냈지만 최종 패소했습니다.

정씨가 어떻게 일해왔는지 한번 되짚어보겠습니다. 한국야쿠르트와 위탁판매계약을 맺고 2002년 2월부터 2014년 2월까지 근무했던 정씨는 보통 8시 이전에 관리점에 출근해 오후 4시까지 판매활동을 했습니다.


정씨는 고객에게 받은 돈을 모두 회사에 전달했고 회사로부터 판매한 제품 수량에 비례하는 수수료를 지급받았습니다. 이 수수료에서 근로소득세가 아닌 사업소득세가 원천징수됐습니다.

정씨는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 사회보험료를 부담하지 않았지만 회사는 정씨에게 적립형 보험의 보험료와 상조회비 일부를 지원했습니다. 회사는 근무복을 제공했고 근무연수에 따라 해외연수 기회도 줬습니다.

한국야쿠르트는 위탁판매원을 상대로 매달 두 차례 교육을 실시했는데 이 자리에서 신제품 출시에 관한 안내, 판촉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 등을 했습니다. 그런 한편 정씨와 같은 위탁판매원은 사내 규정을 적용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1·2심부터 대법원까지, 판단 근거는?…근로자 인정 관련 판례 살펴보니

위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정씨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판단되시나요? 1·2심과 대법원 모두 정씨를 근로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판결문을 통해 법원의 판단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법원은 우선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계약의 형식이 고용계약인지 도급계약인지보다 그 실질에 있어 근로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그간 판례를 전제로 삼았습니다.

법원은 이를 고려할 때 정씨는 한국야쿠르트에서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볼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판매업무를 하면서 근무시간과 장소를 정씨가 스스로 정했고 따로 회사가 따로 근태관리를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회사가 정씨에게 근무복을 제공하고 적립형 보험의 보험료, 상조회비 일부를 지원했지만 "이는 판매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배려 차원일 뿐"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재판부는 정씨가 받은 교육 역시 최소한의 업무 안내, 판촉활동에 대한 독려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재판과정에서 정씨는 "회사가 관리점 내 게시판에 일정표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구체적 업무내용을 지시했고, 고객관리 및 영업활동 지침에 관한 서약서를 지급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계약 의무를 주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시대는 변했는데 판례는 동일…"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비판

대법원은 기존 판례에 입각해 판단을 내린 것인데요, 이번 판결을 두고 "시대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근거로 쓰인 '근로자 해당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과 관련한 대법원 판례는 1990년대와 최근의 문구가 거의 똑같습니다. 시대는 변했는데 판결 근거는 바뀌지 않은 셈입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진 변호사는 "대법원은 새로운 설시를 하지 않은 채 하급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며 "드러난 형식에 따라 노동자 보호를 외면한 판결"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대법원은 2006년 시간강사와 관련한 판결에서 판단 지표를 '구체적 지휘·감독'에서 '상당한 지휘·감독'으로 바꾸고 취업규칙 적용 여부와 관련해서도 이 요소가 인정되지 않더라도 근로자성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기준을 완화했는데 (이번 판결은)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화석화한 판단"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어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한 법원이 진전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2006년 판례 흐름보다도 못한 판결로 실망을 줬다"며 "노동관계의 실체를 진지하게 탐구해 '계약형식보다는 실질에 있어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했는지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길 촉구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골프장 캐디, 시간 강사 판결은?…1만3000명 야쿠르트 아줌마 노동권 우려 목소리도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모든 유사직역 종사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개별적 사안마다 사실관계에 따라 달리 판단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와 관련해 내린 대표적 판결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 가까운 예로 2014년 2월 골프장 캐디가 노조법상 근로자로서의 보호는 받을 수 있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는 아니라고 본 판결을 꼽을 수 있습니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3권은 누릴 수 있지만 근로조건 등 최저한도의 보호를 법적으로 받을 순 없는 것입니다.

당시 재판부는 캐디가 골프장 이용객에게 받는 돈에 대해 골프장이 통제하지 않는 사정 등을 근거로 근로자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하지만 골프장에 종속돼 지휘·감독을 받는 점을 고려했을 땐 노조법상 노조를 구성하고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이들에게도 주어진다고 판단했습니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엔 시간제 학원강사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강사들에게 퇴직금을 주지 않은 혐의로 기소된 손주은 메가스터디 회장은 벌금형을 확정 받았습니다. 학원이 강사의 근무시간과 장소를 정해주는 등 업무를 지휘·감독했다고 본 것입니다.

다시 야쿠르트 아줌마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전국에는 1만3000여명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있습니다. 1971년 41명으로 시작한 판매조직은 대규모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노동권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이번 판결은 '법과 판례가 시대 상황을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거리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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