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우리나라 가족 가치관의 핵심은 가족 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였다.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는 경제력 여부와 상관없이 집안 내에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은 당연했다.
물론 이때까지는 전통적 가족 구조를 거부하는 이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당시 한 법학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의 권위주의는 이혼사유가 될 수 없다. 이혼사유가 된다면 한국 남자들은 모조리 이혼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남편에겐 친구도 없고 친척간 왕래도 없었다. 누군가 집에 찾아오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까탈스러운 성격에 밖에서 식사하기도 쉽지 않아 늘 삼시세끼를 차려내야 했다.
의처증 때문에 돈 벌어오는 것 외에는 할머니가 밖에 나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도 없었다.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산 세월은 사실상 감금생활이었다고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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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지만 환영받지 못했다. 북한에 7남매를 두고 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남편은 모자가 병원에 입원한 동안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 아이가 생기면 낙태를 강요했고 3번의 낙태를 했다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참다못한 할머니는 첫번째 이혼 소송을 진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1심 판결에서 "이 갈등은 피고(할아버지)의 권위적인 태도와 구속에 시달린 원고(할머니)가 이를 벗어나 자유롭게 지내고 싶어하는 반면, 피고는 종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이를 제압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시적'인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면서 "나이, 혼인기간, 생활양식 등을 고려할 때 결혼생활이 파탄 상태까지 이르게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할머니의 청구를 기각했다. 할아버지는 재판관에게 큰절을 하고 할머니와 잘 살겠다는 맹세를 했다.
할머니는 잠시나마 희망을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반성문을 써오라며 할머니를 다시 쫓아냈다. 이후 할머니와 함께 모은 재산 36억원을 독단적으로 한 대학에 기증했다. 반면 할머니는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남편 때문에 정부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3년 뒤 할머니는 절박한 심정으로 두 번째 소송에 임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법원은 "원고와 피고는 이미 40여년간 부부로 생활해왔고 피고 나이가 90세, 원고 나이도 70세가 넘었다"며 "특히 피고가 원고와의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며 남성중심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에게 "황혼의 여생을 해로하시라"는 덕담도 남겼다.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았다. 1999년 8월25일. 드디어 할머니의 꿈이 이뤄졌다. 서울고법 특별8부는 원심을 깨고 "두 사람은 이혼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다음해 대법원에서도 원심 확정 판결을 내렸다. 황혼이혼 소송 중 처음으로 승소한 사례였다.
재판부는 "남편이 부부문제를 대화와 설득으로 풀지않고 함께 모은 거액의 재산을 상의도 없이 대학에 기부하는 등 수십년간 가부장적 권위의식을 고집한 점이 인정된다"며 "이로 인해 부인이 정신적 고통을 겪은 것이 경험칙상 명백하다"고 밝혔다.
할머니는 이혼과 함께 위자료 5000만원과 재산분할액 현금 3억원, 부동산(시가 15억여원) 지분 3분의1도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