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과학] 송유근의 행복

머니투데이 김상욱 부산대 물리교육학과 교수 2015.12.11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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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교육의 목적은 독립이다

천재소년 송유근의 논문 지도교수인 박석재 박사가 25일 오후 대전 유성구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파이언스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표절' 문제로 철회된 송유근(17)군의 블랙홀 연구 논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사진=뉴스1천재소년 송유근의 논문 지도교수인 박석재 박사가 25일 오후 대전 유성구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파이언스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표절' 문제로 철회된 송유근(17)군의 블랙홀 연구 논문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사진=뉴스1


교육은 생명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학습은 우리 뇌가 가진 탁월한 능력이며, 학습시키는 것을 교육이라 한다. 사실 생명의 목적은 단순하다. 생명체 자신을 영원히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신'이 무엇인지가 관건이 된다.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유전자가 '자신'이라는 것이 현대과학의 결론인 듯하다.

유전자는 정보를 담고 있다. 바로 자신을 규정하는 정보다. 하지만 그 정보는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의 정보, 그러니까 겉모습, 기억, 성격, 취향 따위가 아니다. 유전자는 단지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만을 담고 있다. 단백질이 어떻게 부모와 자식 사이의 유사성을 만드는지, 우리는 아직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이처럼 당신은 자식에게 단백질 만드는 정보만을 줄 수 있다. 그 단백질 가운데 일부가 알 수 없는 과정을 통해 '본능'이라 불리는 것도 전달해준다. 어린 아이들은 배우지 않아도 이성(異性)을 보면 좋아하고, 뱀을 보면 피한다. 본능만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천국일 게다.

하지만 우리는 천국에 사는 것이 아니기에 더 알아야한다. 미적분도 알아야하고 수요-공급의 법칙도 알아야한다.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자신을 꾸미는 법도 알아야하고, 성난 직장상사 앞에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법도 알아야한다. 이런 모든 것들을 DNA에 넣어야 했다면 세포는 운동장 만해졌을지 모른다.



우리는 본능이외의 알아야할 모든 것을 학습을 통해 배운다. 학습은 생존을 위해 중요하다. 독버섯이 무엇인지 학습 받지 못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라. 인간의 뇌가 커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뇌가 약간 작았던(1) 네안데르탈인은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반면, 바늘귀가 있는 바늘을 만들 수 있었던 호모사피엔스는 옷을 만들어 이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공짜는 없는 법, 호모사피엔스는 뇌가 커지는 바람에 대가를 치러야 했다. 불공평하게도 그것은 온전히 여성만의 몫이었다.

인간 태아의 머리는 여성의 산도(産道)보다 크다. 바늘귀 있는 바늘을 발명하면 뭐하나. 아기 낳는 일이 바늘귀보다 굵은 실을 바늘귀에 넣는 것이 되어 버렸는데 말이다. 이 때문에 출산은 여성에게 목숨을 건 일이 되었다. 아기 역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산도를 빠져 나가는 데, 장대높이뛰기 하듯이 몸도 180도 비틀어야 한다. 그래서 아기가 나올 때 산모는 아기의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를 보게 된다. 산모가 아기를 잡아 빼다가는 목이 뒤로 젖혀져 질식할 수도 있다. 결국 인간 여성은 출산 시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이처럼 출산이 목숨을 건 도박이 된 것은 큰 뇌, 바로 학습의 필요 때문이다. 학습은 목숨을 걸고라도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예 학습을 조직적으로 하는 교육이란 걸 고안했다. 대부분 문명국가의 인간은 꽃다운 십대를 학교에서 보내야한다. 대개 그 비용은 국가가 지불한다.

물론 인간만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니다. 최장수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을 보면 새끼를 교육하는 어미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때 교육의 목적은 단순하다. 새끼가 어미를 떠나 홀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고 할지 모르겠다.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교육의 목적은 행복일까?

최근 송유근 군의 논문 표절이 큰 이슈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논평을 쏟아낸 터라 내가 굳이 덧붙일 이유는 없다고 본다. 다만 이번 일이 한 사람을 죽이기보다 살리는 기회가 되를 바랄 뿐이다. 송유근의 부모나 그를 지도한 사람들은 분명 그가 행복하길 바랐을 거라 믿는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을 원한다. 심지어 제러미 벤담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행복을 위해 교육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사람마다 행복의 정의가 다를 수 있다. 온종일 물리 공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반대할 것이 뻔하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교육한다면 이미 뭔가 잘못된 거다. 왜냐하면 그때의 행복이란 당신이 정의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이가 직접 결정해야한다는 말이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결국 인간에게도 교육의 목적은 아이의 독립이다. 행복한 삶을 정의하고 그것을 찾는 것은 부모, 교사, 사회의 몫이 아니라 바로 아이 자신의 몫이다.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다.
[맛있는 과학] 송유근의 행복


1)이것은 과학적 오류다. 실제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보다 뇌의 용량이 더 컸다. 네안데르탈인이 바늘귀 있는 바늘을 발명하지 못한 것은 뇌 용량이 작아서가 아니라 유형성숙이라는 전략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유형성숙은 쉽게 말해서 어른이 되어도 어린이의 특징을 갖는 것이다. 유년기가 늘어난 호모 사피엔스는 더 많이 놀고 배우면서 사회성과 창의성을 키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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