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 임산부석' 앉은 아저씨…양보는 없었다

머니투데이 남형도 기자 2015.09.01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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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임산부석 디자인 벽·바닥 핑크색으로 바꾼지 한 달, 양보 실종 여전…"빈 자리 아니냐" 반발도

좌석과 벽·바닥까지 핑크색으로 구분한 지하철 임산부석에 한 30대 남성이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좌석과 벽·바닥까지 핑크색으로 구분한 지하철 임산부석에 한 30대 남성이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사진=남형도 기자


31일 오후 12시 10분. 지하철 전동차엔 벽과 바닥이 핑크색으로 디자인된 좌석이 눈에 띄었다. 서서 지하철을 이용하기 힘든 임산부들을 위해 마련된 '배려석'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은 임산부가 아니었다. 30~40대로 보이는 아저씨, 10대 남학생, 50대 아주머니들이 좌석을 차지한 채 자거나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정작 배가 살짝 나온 임산부는 근처를 서성이다 다른 좌석에 앉기도 했다.

서울시가 그동안 양보가 잘 이뤄지지 않았던 서울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 디자인을 바꾼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양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서울시는 지난달 말부터 지하철 2·5호선 좌석 뒤쪽 벽과 좌석, 바닥까지 분홍색 앰블럼과 띠로 디자인을 개선해 왔다. 기존엔 승객이 앉으면 임산부 배려석인지 구별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핑크색으로 주목도를 높여 임산부들을 배려 받게 하자는 취지였다.



시가 이처럼 디자인을 바꾼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정작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가 아닌 다른 이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31일 정오부터 1시간 동안 지하철 5호선 내 임산부 배려석 48곳을 살펴본 결과 임산부가 앉아 있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절반이 넘는 30여 곳엔 20~50대 연령층으로 보이는 남성들이 앉아있기도 했다.
핑크색으로 도색된 지하철 5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사진=남형도 기자핑크색으로 도색된 지하철 5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사진=남형도 기자
좌석 바닥엔 '핑크카펫은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라고 눈에 띄게 쓰여 있었지만 대다수 승객들이 쳐다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자리에 앉았다. 한 여성 승객은 다른 자리가 있음에도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남성 승객이 일어나자 자리를 그쪽으로 옮겼다. 해당 승객에 왜 임산부 배려석으로 옮겼냐고 묻자 "양쪽 끝자리라 앉기 편해서 옮겼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임산부 배려석인지 모르고 별 생각 없이 앉았단 이들이 대다수였지만, 일부는 비어 있는 자리인데 앉으면 어떠냐고 반발하기도 했다.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있던 한 대학생 승객은 "기사에서 핑크색이 임산부 배려석이라는 걸 봤지만 비어 있어서 그냥 자리에 앉았다"며 "임산부가 언제 탈지도 모르는데 좋은 자리를 항상 비워둬야 하느냐"고 따졌다.



하지만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이 꽉 차 있는 사이 정작 임산부가 앉지 못하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오후 12시 30분쯤 전동차 내로 들어선 배가 살짝 불룩한 임산부는 배려석쪽을 두리번거리다가 자리가 없자 문 쪽에 기대 서 있었다. 임신 6개월 차라는 해당 임산부는 "어차피 배려 받는 건 기대도 안했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배려석에 앉아 있던 2명의 승객들은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다.
지하철 5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한 중년 남성이 앉아 있다./사진= 남형도 기자지하철 5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한 중년 남성이 앉아 있다./사진= 남형도 기자
지하철을 이용하는 대부분의 임산부들은 이와 비슷하게 배려 받기 힘들다고 털어놨다. 주부 A씨(30)는 "두 달 후면 출산예정인데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양보 받은 적은 2번 밖에 없었다"며 "그나마 배가 불룩하면 낫지만 임신 초기일 땐 더 힘들어도 티가 안 나 배려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결국 시민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홍보활동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시민의식이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을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하는데 아직까지 계도가 덜 된 상태"라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홍보가 되면 차츰 나아질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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