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근육' 키운 후지필름, 엔저 '날개'까지 얻었다

머니투데이 도쿄(일본)=김지산 기자 2015.07.29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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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타트 코리아 '위기'에서 배운다-현장에서 본 아베노믹스 <8>-1]

도쿄 미드타워 내 후지필름 본사 1층 후지필름 스퀘어 입구/사진=김지산 기자도쿄 미드타워 내 후지필름 본사 1층 후지필름 스퀘어 입구/사진=김지산 기자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으로 140년 역사의 필름업체 아그파가 도산하고, 100년 카메라 기업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도 살아남은 기업 '후지필름'.

후지필름의 연차보고서(Annual Report) 표지(혁신으로부터 가치창출; Value From Innovation)'와 시게타가 고모리(Shigetaka Komori) 후지필름 회장이 올 5월에 낸 책(위기탈출을 위한 혁신; Innovating Out Of Crisis)'에는 혁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일본 도쿄 미드타운 내 후지필름의 기술 박물관격인 공간 이름도 '오픈 이노베이션 허브(Open Innovation Hub)'다.



혁신은 2000년 이후 후지필름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후지필름은 혁신적 일본 기업의 대명사가 됐다. 후지필름은 이제 생존을 넘어 초일류 기업으로 가기 위한 발판을 착실히 마련 중이다. 혁신을 통해 근육질의 단단한 기업으로 거듭난 후지필름은 엔저라는 날개를 날고 날아오를 채비를 마쳤다.

◇"엔저, 비정상의 정상화일 뿐"



아베 신조 총리의 친구이기도 한 고모리 회장은 '위기탈출을 위한 혁신'에서 1985년 달러 절하·엔, 마르크 절상을 결정한 플라자합의를 일본경제와 기업을 장기불황에 빠뜨린 패착이라고 지적했다. 플라자합의 때문에 비정상적인 환율 여건이 조성됐고 기업 경쟁력은 땅에 떨어졌다는 주장이다.

후지필름만 보더라도 달러 대비 엔 환율이 1엔 오르거나 내리면 영업이익 80억엔(750억원)이 더해지거나 빠진다.

지난 23일 일본 도쿄 미드타운 후지필름 본사에서 만난 겐지 스케노 후지필름 CFO(재무총괄임원)는 "지금까지 정상적이지 않았던 환율을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으로 현재의 환율기조가 지속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후지필름이 단지 엔저 덕을 봐 부활한 기업이라고 판단하면 큰 오산이다. 혁신을 통해 체질을 바꾸는 데 성공했고 환율이 날개를 달아줬다고 보는 게 맞다.

이는 2000년대 후지필름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후지필름은 '타도 코닥'을 외쳤다. 그러다 2000년 이후 디지털카메라 등장으로 구호를 '타도'에서 '혁신'으로 바꿔 불렀다. 후지필름과 달리 중심을 못잡고 머뭇거리던 코닥과 아그파는 결국 패망했다.

스케노 CFO는 "현재 필름 수요는 2000년 당시의 20분의 1에 불과한 수준으로 변신하지 않으면 망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모든 지출 경비와 사업구조를 재검토해야 했다"고 말했다.

필름에서 쌓은 기술로 화장품, 제약, FPD(평판디스플레이) 재료 등에 진출한 후지필름은 지난해 2조4930억엔(23조6610억원) 매출을 올렸다. 컬러필름 역사상 최대 호황이었던 2000년 1조4403억엔(13조6700억원)보다 오히려 73.1% 많은 액수다.
그래픽=김현정 디자이너그래픽=김현정 디자이너
◇"우리가 잘 하는 것, 잘 아는 것 찾아라"
2000년 사장으로 취임한 고모리씨는 아그파, 코닥 등 경쟁사가 축포를 쏘아올리는 동안 고강도 혁신안 마련에 착수했다. 그는 후지필름이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필름 이외 사업'을 찾는 데 부심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그 유명한 4분면 분석법이다. 그는 시장과 기술을 X·Y축으로 설정한 뒤 X축(가로선)은 기존시장과 신시장으로, Y축(세로선)은 기존기술과 신기술로 구분했다.

고모리 사장은 △기존 기술로 기존 시장에 적용하지 않은 것은? △기존 기술로 신시장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새 기술로 기존 시장에 적용할 것은? △새 기술로 새 시장을 열 수 있는 것은? 등을 혁신의 기준으로 삼았다.

4분면 분석 결과가 전면 적용된 건 2003년부터다. 영역 확장은 자본과 연구개발(R&D) 에너지를 투입하거나 기업 인수·합병(M&A)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첫 시도는 화장품 사업이었다. 필름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인 '콜라겐'을 사람 피부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라이프사이언스 사업부를 신설하고 화장품 사업을 밀어붙였다. 후지필름은 2007년 9월 콜라겐을 통한 피부재생을 내세워 아스타리프트라는 브랜드를 내놓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현재 아스타리프트를 판매하는 일본 내 매장이 4000개가 넘는다.

필름 기술을 응용한 LCD용 TAC 필름사업에도 뛰어들었다. 삼성, LG 등 글로벌 LCD 메이커들에 두루 제품을 공급한다. 세계 시장점유율은 70%에 이른다. 후지필름 없는 LCD TV는 존재할 수 없는 구도다.

인수·합병을 통해 육성한 헬스케어 부문은 후지필름의 차세대 사업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헬스케어 사업은 2008년 도야마(Toyama) 화학 인수 후 짧은 시간 내에 성장성을 확인시켜줬다.

도야마가 개발한 감기약 '아비간(Avigan)'이 지난해 3월 일본에서 감치 치료제로 승인을 받았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임상 3상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에볼라, 웨스트나일, 마르부르크 바이어스 등 치사율이 높은 다른 병에도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증명돼 시판 즉시 막대한 수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치료제로 인정받고 있다.

◇10년간 M&A에 6.7조 투입

다카오 아오키 후지필름 전략부문 매니저에 따르면 후지필름은 2000년 이후 MA&에만 7200억엔(6조7840억원)을 쏟아 부었다. 지난해 말 현재 후지필름은 국내·외에 27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종업원 수는 7만9235명에 이른다.

혁신 결과 후지필름은 전혀 다른 회사로 탈바꿈 했다. 2000년 전체 매출의 19%를 차지하던 필름은 1% 미만에 불과한 반면 매출 기여도가 거의 없던 헬스케어 부문은 화장품과 제약이 추가되면서 비중이 16%까지 확대됐다. LCD 재료 사업도 2%에서 6%로 뛰었다.

후지필름은 엔저를 등에 업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아오키 매니저는 "올해 연결 매출 목표로 2조5800억엔(24조3110억원), 영업이익 1900억엔(1조7900억원)을 설정했다"고 말했다.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3.5%, 10.2% 증가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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