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선의 잠금해제]'출판스캔들'을 비껴 '책뇌물'을 상상하다

머니투데이 신혜선 정보미디어과학부&문화부 겸임부장 2015.08.0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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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성인 1년에 책 한권도 읽지 않는 나라의 우울함

[신혜선의 잠금해제]'출판스캔들'을 비껴 '책뇌물'을 상상하다


“본부장, 리스트 좀 가져와 봐요. 이 양반, 좋아하는 성향의 책이 뭔지 딱 나오네.”

최근 압구정에 있는 IT 관련 협회를 방문했을 때다. 상근 L 부회장과 이런저런 업무 얘기를 마무리할 무렵이다.

‘내가 좋아할 성향의 책? 책을 주려나 보군’. 얼핏 20권 정도의 리스트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내밀어 졌을 땐 의아했다. 한 권 고르란다. 책 선물이야 그럴 수 있지만, 리스트까지 작성해 놓다니. 신간과 구간이 고르게 섞인 리스트는 그 자체로 독특하고 신기했다. 책 옆에는 괄호로 숫자가 적혀있었다. 사무실에 남은 해당 책 권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던 건 이어지는 설명 때문이다.



“골프공이니 저장장치니 뭐 고마워하지도 않잖아요. 저희는 기념품 대신 책을 드립니다.”

L 부회장이 직접 책을 골라 갖춰 놓고 방문객이 돌아갈 때 한 권씩 준다는 본부장의 부연 설명이다.



공무원(기획재정부·정보통신부) 출신인 부회장 후배들 말로는 그는 독서광이다. 집을 방문해본 사람들은 사면이 책으로 빼곡한 서재에 놀란단다. 하지만 장식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틈만 나면 책을 읽는 모습, 책을 선물하는 모습이 수십 년 째라니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L 부회장이 대화를 통해 파악한 나의 책 ‘성향’은 ‘인문 고전학’이었다. 틀린 분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다. 맹자, 공자 등 고전을 제치고 ‘이기적 유전자’를 골랐다. “성향은 맞는데 제가 요새 과학에 꽂혔거든요. 이 책 입소문이 꽤 났는데 아직 못 읽었습니다. 부회장님 덕에 늦게라도 읽어보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 이 책도 있네. 최근 회사로 왔는데 후배 줘서 표지 구경만 했는데…” 그 책은 ‘필립 코틀러의 다른 자본주의’였다.

“어, 경제에도 관심 있네.” “무슨 말씀이세요. 명색이 경제지 부장인데요.” “하하, 그렇군요. 특별히 한 권 더 주리다. 우리 사무실에서 두 권 가져간 사람은 신부장이 처음이오.”


방문객이 ‘흔한 기념품’을 받는 과정치고는 좀 여유롭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어느 시중은행 부행장이 책을 몇 권 세트로 만들어 특별 고객에게 추석 선물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책을 공급하는 기회를 얻게 된 출판사 사장의 즐거운 얼굴도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 성인 평균 독서는 1년에 1권이 채 안 된다는 놀라운 보도가 된 적이 있다. 그나마 중고등학생이 OECD 국가 중 높은데 이것조차 모두 입시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옛말에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 빌린 책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이 있다. 왜 도둑질이 아닌가. 그럼에도 책을 살 형편은 안되고, 얼마나 읽고 싶었으면 책을 몰래 가져가겠느냐는 지식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나타낸 말임을 모두 안다.

출판 시장에 ‘곡소리’가 난다. 출판시장은 다른 이슈와 민감하게 연동되는데 사회가 시끄럽고 사건 사고가 많을수록 책 읽기는 멀어지니, 대한민국은 이래저래 책 읽기 좋은 환경은 아닌 듯하다.

더군다나 요즘은 책보다 ‘출판 스캔들’이 독자를 더 솔깃하게 하지 않나. 문단의 최고 권력자로 통하는 작가의 표절 논란은 또 다른 스캔들에 바통을 넘긴 분위기다. 출판계 최고 자리를 지키던 출판사의 전직 사장과 창업주가 소송을 벌이며 한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여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추문이 출판시장의 전부는 아닐 거라 본다. 좋은 책을 만들며 자기 길을 가는 출판사와 책 만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번 주에 회사로 온 많은 책 중에서 지면 사정상 다 소개하지 못해도 꼭 읽고 기회를 봐 소개하자고 후배들과 나누고 별도로 뽑은 책만 해도 여러 권이다.

추석이 한 달 정도 남았다. 고객에게, 지인에게 부담되지 않는 선물을 해야 한다면 책을 선물하면 어떨까. 경매 시장에서 사고파는 고가 미술품과 같은 의미의 책이 아니라면 책이 뇌물소동을 일으킬 거 같지 않다. 책 뇌물? 어떤 의미로 생각해 보니 그런 소동도 한번 났으면 하는 바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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