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면 끊어야 하는데…" 서울역 노숙인의 '슬픈 월급날'

머니투데이 김유진 기자, 김종훈 기자 2015.07.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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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수급비 47만원, 대부분 술값으로…"자발적 변화 이끌 제도 필요"

서울역 일대 지하도에서 노숙인들이 잠을 청하고 있다./사진=뉴스1서울역 일대 지하도에서 노숙인들이 잠을 청하고 있다./사진=뉴스1


"야 막내, 너 오늘 월급탔지? 술 좀 더 사와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달 20일 서울역 1번 출구 앞. 거나하게 취한 노숙인들의 잔치가 벌어졌다. 컵라면과 소주병, 막걸리병이 뒹굴고 있는 길목 사이사이에 앉은 노숙자들은 담배를 나눠 피우며 담소를 나눴다.

"이런 거 필요 없다! 너네나 먹어라!" 한 노숙인이 에스컬레이터를 탄 시민들을 향해 보급품으로 나온 소보루빵을 던졌다. 시민들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괜히 눈을 마주쳐 해코지 당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봤다.



노숙인들은 그런 시민들을 보며 소리내어 웃더니 빵 대신 인근 시장에서 사 온 따끈따끈한 부침개를 때 묻은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막내가 헐레벌떡 검은 봉지에 소주와 막걸리를 사와 아스팔트 바닥에 풀어놓았다. 일찍이 시작한 잔치는 밤 11시가 돼서야 끝났다. 노숙인들은 하나 둘 종이상자를 깔아둔 자리 위에 몸을 누였다.

매달 20일, 서울역 앞에서는 노숙인들의 '축제'가 열린다. 기초생활수급비가 나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올해 기준으로 47만원인 수급비는 노숙인들 사이에서 일명 '월급'으로 통한다. 지난 5월 기준으로 서울시가 서울역 인근에서 사는 것으로 보고 있는 노숙자 수는 244명. 이 가운데 30% 정도가 수급비를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노숙인에게는 수급비가 나오기 힘들다. 주거지가 없이 지낸 지 3개월이면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이 경우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47만원의 월급을 받기 위해 노숙인들은 쪽방이나 쉼터 등을 주거지로 등록해두고 길거리 생활을 한다.

28년차 노숙인 장모씨(44)는 지난해 여름 이 '월급'으로 부산 여행을 다녀왔다. "KTX 부산행 왕복티켓을 끊고 1박에 18만원이나 하는 호텔에서 자고 왔어." 장씨는 지금은 주민등록이 말소돼 못 받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장씨같이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식주나 여가에 돈을 쓰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돈은 대부분 유흥비로 나간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노숙인 입장에서는 이 월급날이 불만의 대상이다. "노숙인들 수급비 받아서 다 술값으로 써 버리는데, 차라리 없애버렸으면 좋겠어." 김모씨(31)는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수급비를 받는 20일이면 꼭 고성과 함께 서울역 광장에서 싸움판이 벌어진다며 투덜댔다. 이날 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한 쪽에선 "네가 뒤에서 내 욕 했냐"는 외침과 함께 두 노숙인이 서로 발차기를 하고 우산을 휘두르며 거리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수급비를 모두 술값으로 탕진하는 노숙인들은 어떤 생각일까. 이들은 타의로도, 스스로도 구제가 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신세한탄을 했다. "나는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갑갑해서 뛰쳐나오게 되더라고. 수중에 돈이 생기면 술 생각이 간절해져. 살려면 끊어야 하는데…. 내 맘대로 잘 안 돼." 이모씨(42)가 소주를 병째로 들이키며 말했다.

그러나 일부 노숙인이 술에 탕진한다고 해서 수급비를 지급하지 않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나라로부터 받은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이기 때문이다.

노숙인들을 오래 보아 온 이들은 이 돈을 쓰는 방식을 제도로 강제할 게 아니라 자발적 변화를 이끌어낼 동력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역홈리스연합회에서 일하고 있는 유수영 목사는 "노숙인들이 수급비를 이용해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며 "사회적 은행 등을 차려서 수급비를 저축하면 나라에서도 대출을 좀 더 해줘 자영업이라도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사실 쪽방이라도 수급비에 비해선 비싸기 때문에 수급비만 받고 방을 빼 길거리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며 "개인공간이 허용되는 염가의 쉼터가 많아져 거리에 나앉지 않도록 해야 알콜 중독 등 사회적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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