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전 30만원 갚으라며 계좌압류, 해지소송에 수백만원…

머니투데이 이재윤 기자, 안재용 기자 2015.03.27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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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소송 간소화 '지급명령' 악용사례 빈발… 악용 사례 처벌 강화 등 필요

/ 자료제공 = 뉴시스/ 자료제공 = 뉴시스


#서울 강남에 사는 유소영씨(가명·61)는 며칠 전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갔다가 계좌가 정지됐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알아보니 지난달 부산지법으로부터 받은 ‘지급명령’때문이었다. 내용인 즉 25년전 주방용품을 구입할 때 빌렸던 30만원을 갚으라는 것.



지급명령 서류에 적힌 채권자를 전혀 알지도 못할 뿐 더러 오래 전 일이라 전혀 기억도 나지 않아 2주간의 이의제기 기간이 주어졌지만 무시했더니 계좌를 정지시켜버린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주방용품 회사에 찾아가봤지만 주소로 된 곳엔 아무 회사도 없었다. 사기를 당한 것 같아 경찰과 법원을 찾아가 알아봤더니 상대방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대답만 듣고 나왔다.



변호사를 찾아 상담을 받았더니 최소 수십만원에서 백여만원의 비용이 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30만원을 사기 당한 것 같아 소송을 하려고 하는 건데 이보다는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설명에 유씨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장기간 진행되는 민사소송 절차를 간소화해 투입시간과 비용을 줄이고 소액 채권자의 권리도 보호하는 독촉절차인 '지급명령'이 인터넷 등에 퍼져있는 개인정보를 이용한 소액 소송사기에 악용되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간편한 절차에 비해 판결 수준의 강력한 힘을 갖는 지급명령을 개인정보를 확보한 불특정 다수에게 신청하는 수법으로 대량의 피해자가 양산 될 가능성도 높다는 게 법조계의 공통된 설명이다.


대법원 지급명령 신청 홈페이지 화면. / 자료제공 = 대법원대법원 지급명령 신청 홈페이지 화면. / 자료제공 = 대법원
◇민사소송서 가장 쉬운 '지급명령'…매년 90만건 신청

돈을 빌려준 사람(채권자)의 신청이 있으면 빌린 사람(채무자)을 심문하지 않고 돈을 주라고 명령하는 재판인 '지급명령'은 법의 테두리에서 가장 간편한 독촉절차 중 하나다.

민사소송을 거쳐 돈을 받으려면 최소 수개월~수년에 걸리는 시간과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지만 서류와 절차를 최소화해 채무로 인한 사회적 소송비용을 줄이는 게 지급명령의 가장 큰 목적이다.

대법원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차용증 등 채무관계를 나타내는 증거와 개인(법인)정보만 입력하고 인지대 등만 내면 지급명령이 신청된다. 이처럼 절차는 간단하지만 지급명령의 법적 힘은 상당하다.

지급명령을 받은 채무자는 서류를 받은 뒤(송달) 2주 내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 하지 않으면 판결로 확정된다. 이를 근거로 채무자의 재산을 확인해(재산명시명령) 계좌를 정지시키거나 부동산 등을 가압류 할 수도 있다.

실제 지급명령 건수는 꾸준히 증가 추세다. 대법원에 따르면 한해 신청되는 지급명령 건수는 2007년 이후 평균 90만건에 달한다. 특히 이 중 전자독촉 시스템을 이용한 지급명령은 2007년 27만111건에서 지난해 81만4338건으로 3배가량 급증했다.

절차가 간단하다보니 지급명령 서류 검증절차는 형식적인 수준에 그친다는 게 대다수 법조인들의 설명이다. 절차를 줄인다는 지급명령의 취지도 있고 신청 건수도 많다보니 법원에서도 이를 감당하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설명이다.

J법무법인 변호사는 "민사소송에서 가장 간단한 절차다. 이름과 주소, 돈을 빌려준 증거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신청이 가능하다"며 "워낙 건수도 많고 금액도 크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법원의 서류 확인은 형식적인 절차"라고 말했다.

전자소송을 이용한 지급명령 신청건수.(2007년~2014년) / 자료제공 = 대법원전자소송을 이용한 지급명령 신청건수.(2007년~2014년) / 자료제공 = 대법원
◇지급명령 이용한 '소송사기'…"취지는 살리되 보완 필요"

이 같은 속성을 이용해 인터넷 등에서 얻은 개인정보 등을 통해 모르는 사람에게 지급명령을 신청하는 일종의 소송사기도 늘고 있다.

앞서 유씨와 같이 법적 절차 등을 잘 모르고 관심이 없는 노인 등을 타깃으로 지급명령을 신청하고 이의제기 기간을 지나치면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다. 법원의 확인 절차를 거치지만 차용증 등을 위조해 지급명령을 신청하는 것이다.

특히 지급명령 이의제기 기간(2주)이 지난 후 이를 번복하기 위해선 민사소송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점을 악용해 100만~200만원의 가량의 소액을 청구한 다는 게 법조계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일선 변호사들의 민사소송 수임비용은 최소 수백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달 절차의 허술함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급명령 서류가 등기로 전달(송달)되긴 하지만 본인이 받지 않더라도 다른 가족이나 이웃 등이 받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지급명령을 신청한 사람이 몰래 집으로 찾아가 가족이라고 서류를 받으면 피해를 막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실제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모르는 사람에게 지급명령을 당했다가 이의제기를 신청하지 못해 계좌정지와 압류 등 강재집행을 당한 건수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69건에 달한다. 법률구조 공단을 통하지 않고 민사소송을 제기한 건수를 합하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란 게 법조계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지급명령이 가진 순기능을 살리면서도 이에 따른 부작용을 막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설명하면서도 무엇보다 자신에게 청구된 지급명령 등의 관심을 갖고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지급명령 채무자 고지의무를 강화하거나 이의제기 기간을 늘리는 방안 등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급명령 등 소송사기 피해에 대한 형사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선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민사소송법 교수는 "지급명령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제도가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고지의무를 강화하는 것 등이 필요할 것"이라며 "민사 소송에 대한 의식을 강화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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