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베스트저장소(이하 일베) 회원들과 자유청년연합 회원들이 지난해 9월 광화문 단식농성장 인근인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는 '폭식 퍼포먼스'를 벌이는 모습. / 사진=뉴스1
서울 강남구 A 고등학교 김모 교사는 올해 졸업생 B군이 일명 '일베충(일간베스트 회원 또는 이용자를 이르는 속어)'이었단 말을 듣고 머릿속에 한 장면을 떠올렸다. 수업 시간 중 장래희망에 대해 발표를 시켰더니 당당히 일어나 포부를 밝히던 B군은 난데없이 한 여대에 대한 비난하는 말을 던졌다. 학급생들은 B군이 툭 던진 말에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농담처럼 퍼지는 일베 용어…"학생들 심각성 인식 못해"=일간베스트(이하 '일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서울 강남 지역 중고등학생 사이에서 특정 성별·지역 비하의 뜻이 담긴 일베 용어, 유머코드가 퍼지고 있다. 대부분 일베 콘텐츠가 풍자와 비하 사이를 오가다보니 누군가를 깎아내릴 때 해당 사이트의 용어가 자주 차용되는 것이다.
/김지영 디자이너
유 교사는 지난해 '일밍아웃(일베 유저라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을 이르는 말)'한 C군의 사례를 들었다. C군은 평소 '일베 형님들이 말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급우들은 지나치게 의존적인 C군의 행동을 놀리며 '5·18 폭동' 등 일베 회원들이 쓰는 용어로 역공했다. 유 교사는 "일베가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궁금해서 한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며 "다른 반 아이들도 다 쓰다보니 단어에 내포된 유해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강남구 중학교에 근무 중인 이모 교사는 "학생들이 일베에 올라왔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비꼰 동영상을 따라하며 한 학생을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털어놨다. 해당 동영상은 모 제약업체의 TV광고로, 운지버섯을 찾기 위해 한 남성이 산을 오르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이 교사는 "학생 여러 명이 한 동급생에게 '운지해라'며 동영상을 따라하는데, 어떻게 제지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 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의원이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거리로 나온 일베 어떻게 볼 것인가?' 토론회에서 한국사회의 증오와 편견, 치유와 대처방안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2014.11.10
일베 특유의 정치·역사관 때문에 학교 수업 시간에 교사와 학생이 부딪히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 국어 교과 담당인 유모 교사는 "수업시간에 서울대 학생들이 쓴 4·19 혁명 선언문에 대해 다룬 후 제자 C군이 찾아와 '수업 내용이 틀렸다'며 항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C군은 유 교사에게 "이승만 대통령님은 부정선거를 하실 분이 아니며 4·19 폭동이 일어나 억울하게 하야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유 교사는 "C군이 다른 수업 시간에 '5·18 민주화 운동이 폭동'이라고 발표해 중간에 제지한 적도 있다"며 "일베 이용자 중에는 해외 유명대 교수나 일선 학교 교사의 자녀들도 있는데 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일베를 하다보니 부모도 통제가 쉽지 않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가치관을 형성하고 의견을 표출하려는 욕구가 강해지는 청소년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특정 지역이나 성별에 대한 비하 발언은 방치할 경우 성인기까지 지속돼 악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학생들은 일베 용어를 다른 욕설이나 상용구에 준하는 단어로 생각할 뿐"이라면서도 "학교에서는 의견을 제대로 고찰하고 올바르게 표출하는 교육과정이 전무하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하면 성인 때도 비슷한 인식이 남아있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