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28억 서울시장 황제공관? 황제는 없고 서점주인이…

머니투데이 김희정 기자 2015.02.28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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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가회동 공관 입주 후 첫 공관만찬, '도서컬렉션'이 황제 수준이네

이달 초 박원순 시장이 입주한 가회동 공관 전경/사진제공=서울시이달 초 박원순 시장이 입주한 가회동 공관 전경/사진제공=서울시


"이곳은 여러분의 집입니다. 저는 잠깐 빌렸을 뿐입니다."

지난해 1월 초 이스트리버를 굽어보는 맨해튼 이스트엔드 애비뉴 88번가의 그레이시 맨션 앞. 12년간 주인이 없었던 뉴욕시장 관저에 추첨을 통해 방문기회를 잡은 시민 5000여명의 발길이 이어졌다.

빌 드 불라지오 현 뉴욕시장은 당선 초기 관저 입주를 망설였다. 친서민 정책을 내걸어온만큼 호화로운 관저 대신 개인 사저인 브루클린 연립아파트에 거주한다는게 어울린다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불라지오 시장은 경호상의 어려움과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시장 관저를 외면하는게 지나친 이미지관리로 비칠 수 있는 점을 고려해 가족회의 끝에 입주했다. 입주와 동시에 공관을 개방한 깜짝 이벤트로 뉴욕시민에게 또 하나의 추억을 줬다.



뉴욕 맨해튼 부촌인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시장공관 '그레이시 맨션.' 이스트 엔드 애비뉴 88번가에 자리잡은 그레이시 맨션은 217년의 긴 역사를 자랑한다. /사진=위키피디아뉴욕 맨해튼 부촌인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시장공관 '그레이시 맨션.' 이스트 엔드 애비뉴 88번가에 자리잡은 그레이시 맨션은 217년의 긴 역사를 자랑한다. /사진=위키피디아
◇'28억 전세' 가회동 공관, 시장공관은 얼마여야 하나

에릭 가세티 로스엔젤레스(LA) 시장의 공관은 석유재벌 폴 게티의 아들인 조지 게티 2세의 이름을 따 지어진 '게티하우스'다. 1975년 건축규제법에 따라 회사본사 건축이 무산되자 LA시에 무상양도됐다. 게티하우스도 초기엔 공식행사와 의전용으로 이용되다 1977년 톰 브래들리 시장 때부터 공관으로 사용됐다.



로스엔젤레스 시장공관인 게티하우스. LA시청으로부터 15분 남짓 거리로 긴급상황에 대비해 근접성이 뛰어나면서 석유재벌 게티가문이 기증한 주택답게 고급스러움을 자랑한다. /사진=위키피디아로스엔젤레스 시장공관인 게티하우스. LA시청으로부터 15분 남짓 거리로 긴급상황에 대비해 근접성이 뛰어나면서 석유재벌 게티가문이 기증한 주택답게 고급스러움을 자랑한다. /사진=위키피디아
공관에 시민을 초청하는 것도, 재벌에게 기증받은 건물을 시장의 공관으로 쓰는 것도 서울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뉴욕과 LA시장이라면 호화공관 논란을 비껴가기 위해 멀쩡히 예산을 편성받아 지은 시장공관을 중소기업 게스트하우스로 바꾸는 일도(오세훈 전시장), 전세집을 찾느라 눈치볼 일도 없었을 게다.

지난 26일 저녁 박원순 서울시장이 '황제공관' 논란 속에 가회동 단독주택으로 입주하고 처음으로 기자들을 대상으로 공관만찬을 진행했다. 대지 660㎡에 연면적 405㎡ 규모. 지하 1층, 지상 2층의 '북촌' 단독주택.

서울시장 가회동 공관 1층 서재 겸 회의실/사진제공=서울시서울시장 가회동 공관 1층 서재 겸 회의실/사진제공=서울시
대문을 지나 왼쪽에 차고(관용차는 카니발)와 창고. 오른쪽으로 한옥식 소대문을 지나 드러난 마당은 만찬용 라운드 테이블을 수에 맞춰 놓기에도 빡빡했다. 1층은 4평 남짓 주방과 통로를 빼곤 모두 서재로 터 통창을 제외한 대부분의 면이 책장으로 빼곡했다.


◇"밥은 굶어도 책은 샀다"… 황제는 어디가고 책만 빼곡

해가 진 저녁, 시장공관을 진짜 궁 부럽지 않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도서컬렉션'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수십년간 모아온 서적이 약 6만권. "밥은 굶어도 읽고 싶은 책은 꼭 샀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서관에서 찾을 수 없을 법한 희귀 논문과 판결집, 시사잡지가 카테고리별로 전문 사서의 솜씨처럼 정열돼있다. 각국 전범과 홀로코스트, 공화국별 검찰 자료, 부패방지위, 해방전후 등 한국사, 경제 등 분야도 다양했다.

박 시장은 서울시장에 출마하기 전 염태영 수원시장의 부탁으로 장서 5만여권을 도서관을 개관하는데 기증한 바 있다. 해외도시를 갈 때 서점에는 꼭 들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 관계자는 "(박 시장이) 공관서재에 둔 자료만 분야별로 모은 파일이 1200건, 도서는 5700여건에 달한다"고 말했다.

가회동 서울시장 공관 1층의 서재 겸 응접실/사진제공=서울시<br>
가회동 서울시장 공관 1층의 서재 겸 응접실/사진제공=서울시
가족들과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은 2층, 공개는 되지 않았다. 서울시 총무과 관계자는 "사적인 공간이라 공개는 어렵지만 3평안팎 규모의 방이 총 4개인데 생각보다 작아 놀랐다"고 말했다.

◇가회동 그리고 2년 후, 서울시장 공관의 딜레마

전세보증금 28억원이란 액수를 감안해 '기대하는' 규모에 비교하면 한 마디로 협소했다. 사실 면적부터 1만8000㎡의 부산시장 관사, 1만5000㎡의 총리공관, 1만4700㎡의 외교부장관 공관과 비교되지 않는다(서울시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서울시장 혜화동 옛 공관.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등재 추진 등을 이유로 리모델링을 계획하면서 비우게 됐다. 서울시장 혜화동 옛 공관. 한양도성의 유네스코 등재 추진 등을 이유로 리모델링을 계획하면서 비우게 됐다.
박 시장은 "가회동으로 오고 지지율이 떨어지니 서울시장을 하기엔 오히려 명당"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대권 바람'이 들지 않고 시정에 충실할 수 있는 공간이란 뜻에서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2년 후 박 시장은 공관을 또 구해야 한다. 도시외교에서 중요한 관례인 공관 초청행사나 만찬 등 본연의 기능을 다하려면 화려하진 않되, 초라하지 않고 품격 있으면서 무엇보다 민심을 살펴 '저렴해야' 한다.

긴급 상황시 재난선포 등 시장의 책무를 신속히 수행하려면 게티하우스나 그레이시 맨션처럼 시청에서 15분이내 거리에 마련해야 한다. 지대가 비싼 서울 하늘 아래서 한 마디로 수수께끼다. 집 주인이 전세비 올려달라 안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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