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언론에 '정아'라는 가명으로 소개된 아기 이야기다. 경찰은 CCTV를 열어 아기를 버린 범인을 찾아냈다. 아기는 다시 가족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가족은 난감해했다. 아기를 버린 범인이 바로 가족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중국인 동포로 불법체류자였다. 아기의 할아버지가 말했다. '키울 조건이 된다면 왜 버렸겠냐.'
이주여성지원센터의 김은숙 이사장(왼쪽)과 김해성 지구촌사랑나눔 대표. /사진=이경숙 기자
정아가 기어가 케냐 출신 모니카(가명)한테 안기자 모니카의 딸 세라가 '잉~'하며 모니카한테 매달렸다. 태영이도 태국 출신인 자기 엄마한테 더욱 찰싹 달라붙었다. 김 이사장은 "모니카가 정아까지 잘 돌봐주긴 하지만 아기들을 돌봐줄 일손이 더 필요하다"며 "직원 채용도 하겠지만 봉사자도 더 구하려 한다"고 말했다.
정아와 세라, 태영이는 피부색은 다르지만 처지는 같다. 이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불법체류자가 됐다. 한국은 부모 국적에 따라 아기한테 국적을 주는 '속인주의' 국가인데, 이 아기들은 부모가 난민이거나 불법체류자, 또는 한국인 아빠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라 한국 국적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 아기들이라면 받을 수 있는 정부의 보육, 의료 복지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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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기들처럼 미등록 상태인 아동이 몇 명인지는 정확한 통계조차 없다. 불법체류자 또는 미등록 이주여성이 출산하면 출생 등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가 밝힌 불법체류자는 20만여 명. 그 중 18세 미만은 최소 5천여 명으로 짐작된다. 출입국 기록이 아예 없는 국내 출생 아동까지 합하면 미등록 아동과 청소년 수는 1만~2만 명에 이를 것으로 이주민 관련 단체들은 추산한다.
김해성 대표는 "국내 체류 외국인들 간 결혼과 동거가 늘면서 원치 않는 임신에 따른 출산도 늘고 있다"며 "이렇게 태어난 아기는 한국 국적이 없어 정부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미혼모지원센터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자원봉사자가 자신의 아이(맨 왼쪽)과 함께 정아(가운데)를 돌보고 있다. 태영이는 태국인 엄마(맨오른쪽)가 직접 보살핀다.
이주여성지원센터는 1년 전 김 대표가 받은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했다. 국내 한 미혼모지원센터가 15살 된 조선족 소녀가 낳은 아이를 맡아달라고 연락한 것이었다. 그가 뒤늦게 찾아갔을 때엔 소녀는 아기를 두고 중국으로 돌아갔고, 아기는 한국인 지인이 데리고 간 뒤였다.
김 대표는 "이 일을 겪은 후,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여성 임산부들이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면 도움을 받기 쉽지 않고 심지어 영아를 유기하거나 죽이는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래서 추진했던 '이주여성 베이비박스 설치' 아이디어는 반발에 부딪혔다. 입양아 모임 회원들이 찾아와 "입양 후 30~40년 뒤 뿌리를 찾아 한국에 왔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어 절망했다"며 "버려지는 아기들의 인권을 생각해 봤느냐"고 말했다.
김 대표는 "엄마가 버리지 않도록 아기를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돕기로 했다"며 "미혼모가 된 이주여성이나 난민 여성, 결혼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갈 곳이 없는 이주여성과 아이들이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취지로 설립된 이주여성지원센터는 지하 1층, 지상 5층 800㎡ 규모로 산모와 영아가 생활하는 단칸방 12개, 혼자 남겨진 아기들이 지내는 영아원 1개, 어린이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그룹홈 등 최대 200명이 여기서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 센터를 설립한 사단법인 지구촌사랑나눔(www.g4w.net)은 입주여성들에게 15개국어로 상담을 제공하고 아기들에겐 양육과 검진을 지원할 예정이다. 1992년 외국인노동자를 위해 상담과 쉼터를 제공하면서 문을 연 이래 이 단체는 이주민 극빈층을 무료 진료하는 이주민의료센터, 다문화어린이대안학교, 미취학 아동을 돌보는 어린이집, 이주민 정착을 지원하는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난민 신청 중인 모니카. /사진=이경숙 기자
하지만 개소 후 2주가 지난 센터엔 아직은 필요한 게 많아 보였다. 인터뷰를 하면서 김 대표가 기증 받은 중고탁자에 붙은 견출지를 손톱으로 떼어내고 있는데, 한 직원이 다가오더니 부족한 부엌살림 리스트를 죽 읊었다. 안전매트가 넓게 깔린 아기들의 놀이방엔 보행기 등 기본적인 물품 외엔 그다지 아기들이 가지고 놀 만 한 게 없었다.
일손도 부족했다. 김 이사장은 "모니카가 정아까지 돌봐주긴 하지만 아기들을 돌봐줄 일손이 더 필요하다"며 "직원뿐 아니라 봉사자도 더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법이나 정부의 복지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민간이 함께 거둬야 한다"며 "출산율이 떨어져 미래 일꾼이 부족해질까봐 우려하는 상황인데 우리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우리가 함께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우리 사회엔 태어나자마자 난민이 된 수천, 수만 명의 '정아'들이 있다. 김 대표의 말처럼 우리는 '정아'들을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사건을 일으킨 '조승희'로 키울 수도 있고, 인권변호사를 거쳐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오바마'로 키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