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대신 3개월째 수사중인 아내 "증거 찾아오라고 해서…"

머니투데이 김유진 기자 2015.01.27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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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열린 한 운동회 모습/ 사진=머니투데이서울에서 열린 한 운동회 모습/ 사진=머니투데이


지난해 10월 임정훈씨(가명·39)는 바쁜 일정을 쪼개 참석한 큰 아이 유치원 운동회에서 고관절이 탈골되는 사고를 당했다. '아빠달리기대회'에서 임씨를 뒤따라오던 다른 아빠가 세게 밀치면서 벌어진 사고였다.

병원으로 이송돼 5시간의 수술을 받은 임씨는 3개월이 지난 이제야 겨우 병상에서 일어나 목발에 의존한 채 걸을 수 있게 됐다. 병원비로 지불한 금액만 1000만원. 운동을 좋아하던 임씨는 회사 생활도 중단한 채 병상에 누워 하루하루 우울해져갔다.



이런 남편을 지켜보던 김정연씨(가명·37)도 속이 탔다. 사고 당시 너무 놀라 누가 남편을 밀었는지 보지도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누가 밀었는지 모르니 피해 보상은커녕 사과조차 못 받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우선 남편을 밀친 사람이 누군지 찾기 위해 유치원으로 향했다. 김씨는 "유치원에서 '아버님을 밀친 분도 우리 가족이시지 않냐'면서 말해줄 수 없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운동회 내내 유치원 측에서 사진을 찍었기에 그 자료를 달라고 부탁했으나 받지 못했다고도 덧붙였다.



유치원 측으로부터 협조를 받지 못한 김씨는 서울 수서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러나 김씨의 억울함은 경찰서에서 더 커졌다. 김씨는 "접수 며칠 뒤 전화를 해 온 사건 담당 형사가 ‘뭘 찾으라는거냐, 나는 못 찾으니 유치원에 가서 증인과 증거를 찾아와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말 몰라서 그러는데 증인과 증거를 직접 찾아야 하느냐'고 묻자 형사는 '그럼요 제가 어찌 찾아요'라고 말했다"며 "스스로 찾기 힘드니 경찰을 찾아온 거라고 설명했지만 형사는 '안 찾아오면 사건 종결시키겠다'고까지 말했다"고 밝혔다.

김씨의 자체적인 수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사건 수사하기 힘드니 증거와 증인 찾아와라'는 경찰의 말에 김씨는 운동회 장소에 설치된 CCTV를 구하러 한강 공원을 돌아다녔다. 편의점과 인근 식당에 가 'CCTV 없냐'고 묻자 '잘 모른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인근에 있던 한 순경은 'CCTV 수집은 경찰이 할 일인데 왜 본인이 하고 있냐'며 안타깝게 보기도 했다.


김씨는 또 친하지 않은 유치원 학부모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교육청에 해당 유치원에 대해 물어보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시도했다. 그러나 하나같이 돌아온 답변은 '경찰이 협조요청을 하면 자료를 내 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씨에 따르면 오히려 유치원의 한 관계자는 김씨에게 "경찰에서 요청하면 협조해 드릴텐데, 그게 아니라서 독단적으로 도와드리기 힘들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이 사건 접수할 당시 유치원에 1차례 전화가 온 뒤 김씨가 수사를 하러 다닌 2달동안 연락이 온 적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3개월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는 김씨는 "아무에게도 협조를 못 받는 상황이고 자력구제는 법으로 금지돼 있으니 경찰을 찾아갔는데 도움을 받지 못했다"며 "너무 억울하지만 어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해당 형사는 "다친 피해자 당사자가 전치 10주가 나왔기 때문에 거동이 가능해서 경찰서에 나와 진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수사 진행이 늦어진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김씨에게 직접 증거를 찾아오라거나 사건을 종결시키겠다고 윽박지른 적 없다"며 "다만 당시 운동회에 있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닐 텐데 가해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부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사 태도에 대해서는 경찰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 청문감사관은 "세 달 동안 사건을 그대로 방치해 둔 건 분명히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범인을 특정할 만한 최소한의 노력을 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경찰서 청문감사관도 "이미 접수한 사건을 어렵다며 수사 못 하겠다고 하거나 직접 증거와 증인을 찾아오라고 할 수 있는 재량권이 경찰에게는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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