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보물도 1호만 외우죠? 관리하는 번호를 1,2등으로"

머니투데이 대담=신혜선 정보미디어과학부·문화부장 , 정리=양승희 기자 2015.01.19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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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투초대석]나선화 문화재청장…"비슷해지는 미래생활, ‘전통문화’가 정체성 증명한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우리 문화재가 인류 전체의 문화자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창현 기자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우리 문화재가 인류 전체의 문화자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사진=김창현 기자


국보 1호를 묻는 질문에 “숭례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아도, 국보 70호가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순위 경쟁에 길들여진 교육 문화 탓이다. 국보 1호, 보물 1호만이 가장 중요한 문화재인 것처럼 배워온 학습 문화 때문에, 다른 문화재들은 상대적으로 ‘무시’되기 일쑤였다. 지난 2008년 숭례문 화재 사건에 국민들이 극도의 분노를 표출한 것도 그것이 ‘1호’였기 때문 아닐까.

나선화(66) 문화재청장은 “국보 번호가 ‘가치’에 따라 매겨졌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최근 국보 번호를 둘러싸고 1호 변경, 번호 폐지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는 어지러운 상황을 두고, 나 청장은 “번호의 의미를 축소하는 쪽으로 무게를 싣고 있다”며 답변을 ‘정리’했다.



그는 “교육이 잘못된 것이라면 1호가 더 중요한 게 아니라고 제대로 교육하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교체나 폐지부터 논의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힘줘 말했다.

한국미술사를 전공, 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실장으로 35년간 재직한 나 청장은 ‘현장 전문가’다. “우리 삶의 흔적을 찾는 문화재엔 등급이 없다”는 게 그의 지론. “청자와 백자는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나무의 잎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무 전체는 토기나 옹기죠. 투박한 토기 한 점이 매끈한 백자·청자만큼 아름답고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2013년 12월 문화재청장을 맡은 그는 “앞으로 우리 문화유산의 알려지지 않은 가치를 발굴하고 국제사회와 소통하는데 힘써 우리 문화재가 인류 전체의 문화자산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여성들은 힘든 자리는 피한다는 편견을 깨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김창현 기자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여성들은 힘든 자리는 피한다는 편견을 깨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김창현 기자
-취임 1주년 소회가 궁금합니다.
▶숭례문 부실 복구 논란 이후 문화재청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청장직을 맡았어요. 부임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전문직에 있는 사람이 공직을 맡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확고했는데, 청장직을 제안받을 때 ‘깨끗한 사람이 맡았으면 좋겠다’는 권유에 마음이 바뀌었어요. 여태껏 어떠한 비리와도 연관된 일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조직을 바르게 정립하는 일을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죠. 더욱이 ‘여성들은 힘든 자리는 피한다’는 편견을 깨트리고 싶었어요. 제가 어려움이 많은 자리에 가서 조금이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여성의 능력을 증명해 보이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화재 지정번호 체계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어떤 해결 방안이 필요할까요.
▶문화재 지정번호는 효율적 관리를 위한 행정번호일 뿐인데, 앞 순서일수록 가치가 높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요. 문화재 번호는 중요도에 따라 번호를 매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강조하고 싶어요. 2005년 이후 최근까지 지정번호 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어서 문화재청에서도 신중하게 접근하려고 해요. 그래서 2월에 문화재 지정분류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의뢰하려고 합니다. 제도의 연혁과 운용상의 문제점, 해외 사례 등에 대한 연구를 거쳐 합리적인 운영방향을 모색할 계획이에요. 무엇보다 문화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사전에 생기지 않도록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는 일을 선행해야할 것 같아요.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특별히 조명하거나 재정비해야할 사업들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광복 70주년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변질되거나 훼손된 문화재를 찾아 정리하고, 광복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념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개성 만월대 발굴조사와 궁궐과 무형유산을 활용한 축제, 항일독립운동 관련 문화재 특별전시 등을 검토하거나 추진 중이에요.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와 경제 발전기를 거치며 그동안 정신사적으로 망각한 부분을 재정립하는 일이에요. 대표적인 것이 일제시대에 훼손된 ‘사직단’의 복원입니다. 원래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지만 사직공원 조성과 도로 개설, 도서관 건립 등으로 본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민족의 얼을 되찾고 잃어버렸던 정신문화를 되찾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거든요.

-최근 우리나라 ‘유네스코 유산’ 등재 성공률이 높습니다.
▶지난해 남한산성, 농악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됐죠.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유산 11건, 인류무형유산 17건, 세계기록유산 11건 등 총 39건의 유네스코 유산을 보유한 ‘문화강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국 전통문화의 가치를 세계인과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네스코 등재는 무척 중요해요. 실질적으로는 관광객이 증가하는 효과도 있거든요. 최근 우리나라의 등재 성공률이 높은 이유는 전문가들이 유네스코 선정 기준에 맞추기 위해 수년간 연구하고 검토하고 해석한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유네스코 유산’ 등재 기준에 우리 문화재가 제대로 부합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근래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선정 경향이 ‘세계 문화권이나 타지역 문화와 소통한 흔적이 있는가’ 쪽으로 바뀌고 있어요. 올해는 ‘백제역사유적지구’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데, 지난해 9월 유네스코에서 실사단이 왔을 때 백제가 바닷길을 통해 다른 지역, 다른 국가와 소통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강조했어요. 오는 6월에 등재 결정이 날 텐데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외에도 인류무형유산으로 ‘줄다리기’, 세계기록유산으로 ‘유교책판’과 ‘KBS 이산가족 방송’ 등재 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유산’ 등재로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2008년 국보 1호인 숭례문 화재 사건을 계기로 문화재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크게 올라갔습니다. ‘먹고 사는 것만큼이나 우리의 문화재를 보호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여론이 생겨난 거죠. ‘경제발전’이 사회의 최우선적 목표였던 과거에는 국민들이 문화재에 크게 관심을 갖기 힘들었지만,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정부에서도 문화재 분야에 예산을 조금씩 늘려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높은 관심만큼 정부가 ‘문화재 보호 및 관리’에 소홀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지내온 문화재는 세월의 무게에 따라 크고 작은 상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썼던 재료와 방식 그대로 유지·관리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그동안 경제에 집중하느라 문화재가 훼손돼도 임시방편적으로 수리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이제 기존의 보존관리 체계를 돌이켜 반성해보고, 보완·개선책을 모색해야 할 전환점이 왔다고 생각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리하고 수리할 계획이신가요.
▶현재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고 있는 문화재는 경복궁, 창덕궁 등 서울 안 5대궁과 종묘, 조선왕릉 정도예요. 나머지 문화재는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전담인력이 1~2명씩 정도라 많이 부족한 실정이죠. 다행히 문화재를 보호하고자 하는 시민의식이 높아져서 자원 활동가인 ‘문화재 돌보미’나 ‘지키미’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올해는 ‘문화재 전문관리사 제도’를 만들어서 돌보미와 지키미에게 자격증을 부여하고, 이분들이 실질적으로 문화재 모니터링을 하고 간단한 보존 처리를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어요. 또 수리와 복원시 비리가 생기지 않도록 ‘실명제’를 적용해 투명하게 운영하고, 과학기술, 정보통신기술 등 최신 기법을 동원해 50년 살 문화재가 100년 넘게 살 수 있는 지속적인 보존책을 만들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문화재 예산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올해 문화재청 재정지출 규모는 2014년 6199억원에서 6887억원으로 9.9% 증가했습니다. 매년 증가폭이 늘고 있지만, OECD 주요국가에 비하면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어요.(우리나라 문화분야 내 문화재예산 점유율은 2010년 기준 0.18%로 OECD 평균인 0.24%에 비해 낮음) 올해는 문화재 중에서 일단 보존이 시급한 것부터 수리·복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 예산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에요. 지방자치단체에서 문화재청에 수리를 요청한 것 중에 33%밖에 예산 지원을 못해줄 정도니까요.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더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올해 국립해양연구소가 가지고 있는 수중탐사선을 활용해 본격적인 해저발굴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김창현 기자나선화 문화재청장은 "올해 국립해양연구소가 가지고 있는 수중탐사선을 활용해 본격적인 해저발굴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진=김창현 기자
-문화재청에서 관리하는 문화재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문화재부터 천연기념물, 명승, 바다 속 해저문화재,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 해외에 나가있는 문화재까지. 전국 국토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가 이어져 있는 모든 곳의 문화재가 그 대상입니다.

-그 중 해양문화재에 대한 탐사·발굴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지난해 영화 ‘명량’을 보면서 저는 ‘바다 경영’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어요. 역사적으로 바다가 열려 다른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할 때, 나라가 경제적으로도 부강하고 문화적으로도 융성했거든요. 3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해상교역이 특히 중요했습니다. 우리 문화재 중에도 중앙아시아를 넘어 지중해 국가 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요. 그래서 올해는 특히 수중 문화재 발굴에 힘써보려고 합니다. 현재 해저에 잠긴 문화재는 청에 신고된 것만 해도 200개가 훨씬 넘어요. 그동안 탐사를 많이 못했는데 국립해양연구소가 가지고 있는 수중탐사선을 활용해 본격적인 해저발굴에 나설 계획입니다.

나 청장이 정의하는 문화재는 우리 일반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각 시대마다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 철학, 가치관, 미학, 기술이 들어있는 문화유산이 곧 문화재라는 인식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살고 있는 집, 먹고 마시는 음식 등이 500~1000년 후엔 문화재로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기록’될 뿐인가, 아니면 ‘정체성’을 지닌 기록물로 남을 것인가. 우리 문화재에 역사적 가치를 이입하는 숙제, 나 청장의 고민은 여기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미래 시대에는 화폐도 하나가 되고, 전 세계인들이 비슷한 형태의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는 등 지구가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이게 될 거예요. 여기서 ‘나’라는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각자의 고유한 ‘전통문화’ 밖에 없지 않을까요? 전통 문화재를 계승해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와 국민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정립해줄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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