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환풍구 사고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가져야 할 자세

머니투데이 박소연 기자 2014.10.2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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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여담]대형참사가 가져다준 '전국민 학습효과'…사회발전의 계기 삼아야

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구 추락 사고의 원인으로 국내 환풍구 시설의 구조적 위험성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19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환풍구 앞에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 유동인구가 많고 집회와 문화행사가 빈번한 이곳 역사 인근의 환풍구 시설에도 안전 경고 문구나 접근을 차단하는 칸막이 장치가 전무해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사진=뉴스1판교 테크노밸리 환풍구 추락 사고의 원인으로 국내 환풍구 시설의 구조적 위험성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19일 오후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 환풍구 앞에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 유동인구가 많고 집회와 문화행사가 빈번한 이곳 역사 인근의 환풍구 시설에도 안전 경고 문구나 접근을 차단하는 칸막이 장치가 전무해 개선이 시급해 보인다. /사진=뉴스1


"미친 XX. 거긴 왜 올라가갖고. 지가 애들이야? 그걸 왜 보러 가."

지난 18일 새벽 1시, 판교 환풍구 붕괴사고로 숨진 희생자들이 안치된 한 병원에 울려퍼진 한 유가족의 흐느낌. 유가족들마저 희생된 자기 가족을 탓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고 희생자 장례식장이라곤 믿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사고 발생 7시간이 지나도록 빈소가 마련되기는커녕 유가족들은 병원 한켠에 불편하게 쭈그리고 앉아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습니다.

'걸그룹 공연장 20여명 추락'. 일주일 전인 17일 저녁 6시 반쯤, 소위 '불금'에 날아든 예기치 못한 속보에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정신없이 소방과 경찰에 취재를 하면서도 사고경위가 좀체 예측되지 않았습니다. '뉴키즈 온 더 블록'으로 대표되는 압사 사고가 뇌리를 스쳤지만 어떻게 '추락'이 가능한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사고의 실체는 '환풍구 붕괴'로 판명됐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사고원인이었습니다. 환풍구는 너무나 일상적인 공간이며, 그렇기에 추락이나 사고의 위험성을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백명이 서로 부대끼며 공연에 집중하다 보면 자신이 밟고 있는 곳이 환풍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환풍구가 지상에서 떨어진 높이의 주차장 환풍구로 알려지면서 '거길 왜 올라갔냐'는 비난이 빗발치기 시작한 겁니다. 실제 사고대책본부는 사고 직후 분당구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환풍구가 1.2m 이상 높이였기 때문에 안전펜스 설치 의무가 없다"고 밝혔지만 이 환풍구의 실제 높이는 성인 남성 허리 정도인 60~95cm 정도로 경사져있어 누구나 주변 화단을 딛고 쉽게 오를 수 있는 구조로 돼있습니다.



대책본부는 초반에 이처럼 환풍구는 사람이 밟는 용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안전기준이 없다는 주장을 계속했으나 문제는 머지않아 속속 드러났습니다. 크고 작은 환풍구 추락사고가 끊이지 않는데도 건축법에는 안전점검이나 환풍구 안전설치 기준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정부는 전국의 환풍구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해외 선진국의 환풍구는 애초에 비용을 들이더라도 안전을 고려해 밟을 수 없는 형태로 설치된다는 사실까지 알려지자, 이들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니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번 사고 이후 평소 무심코 밟고 다녔던 환풍구 근처에 얼씬도 않게 됐다는 지인들의 이야기, 들어보셨을 겁니다. 저도 며칠 전 출근길에 있는 지하철 환풍구에 발을 놓으려다 소스라치게 놀라 발을 뗐습니다. 우린 이제 환풍구를 예전과 다른 눈으로 보게 됐습니다. 27명 사상자를 낳은 대형참사로 전 국민이 톡톡한 '학습효과'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오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사회기반시설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고 시설의 유지관리 전문 인력을 갖춘 선진국과 달리 우리나라에는 여전히 사회 시스템 곳곳에 위험과 취약점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부조리를 발견하고 개선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데 너무나 많은 무고한 인명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그날 환풍구에 오른 이들이 정말 일부 악성댓글에서 언급하듯 '걸그룹에 환장한', '나잇값도 못하는'. '미개하고 철없는' 이들이었을까요? 취재 결과 이들 대부분은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습니다. 이번 사고에 개인 책임이 없었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모두 그 상황에서 똑같이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탓하고 비난하기보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에게 환풍구의 위험을 알려줬고, 유사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관련 규정이 만들어지게 해줬으니까요.

'무고한 희생을 통한 사회 시스템 취약점 발견'이란 비극은 최근 무한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6개월 넘게 진상규명과 특별법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아직 특별한 제도개선은 없었을지언정 이 참사는 이미 우리에게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선박', '해상구조'와 관련된 안전규정뿐 아니라 개개인의 안전인식도 대폭 향상됐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배를 탈 때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까요? 퇴선 명령이 없더라도, '그대로 있으라'고 해도 알아서 탈출할 겁니다. 지난달 30일 신안 홍도에서 유람선 '바캉스호'가 침몰했지만 109명 전원이 구조된 건 어쩌면 세월호 희생자 304명 덕분인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태안 해병대캠프와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이후 무분별한 사설캠프 영업실태와 부실한 체육관의 부실시공이 드러나며 수학여행과 현장체험학습, 신입생 OT에 대한 안전 매뉴얼이 재정비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처럼 희생이 거듭된다고 같은 참사가 재발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이후 세월호 참사가 반복됐으며, 1994년 성수대교가 붕괴되자 정부는 1995년 1월 '시설물안전관리 특별법'을 제정하고 시설물 유지관리를 실행할 법적 근거를 신설했지만 곧바로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사회 곳곳에 쌓여온 문제를 바로잡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남겨진 우리는 안타까운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각 사고에서 교훈을 발견하고 사회발전의 계기로 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고한 이들의 희생 없이도 사회가 안전하게 돌아가는 날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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