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녹턴 20번 : 달콤한 애수

딱TV 김민영 한국무역협회 전문위원 2014.07.1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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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TV]Nocturne No.20 in C# minor, Op. posth

편집자주 김민영의 딱클래식 - 피아노 치는 글로벌 마케팅 전문가, 한국무역협회 전문위원 김민영이 딱 찍어 초대하는 클래식 음악


죽음으로 이른 이별

조르주 상드가 쇼팽에게 이별을 통보한 2년 후,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파리의 종이 새벽 3시를 알릴 무렵 숨을 거둔다. 상드는 쇼팽의 임종시 곁에 없었다. 쇼팽이 죽음에 가까이 갔을 때 상드가 쇼팽에게 보냈다는 편지는 쇼팽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쇼팽이 상드에게 보낸 편지도 전해지지 않았다.

확실치 않으나 쇼팽의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그의 곁을 지켰던 쇼팽의 누이 루드비카가 편지를 차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상드는 쇼팽의 임종을 보지 않은 것일까, 못한 것일까?



쇼팽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쇼팽에게 달려간 여인은 델피나 포토카(녹턴 10번 & 13번 참조)였다. 한걸음에 달려온 델피나 포토카를 보고 쇼팽은 이렇게 속삭였다. “바로 이래서 신께서 나를 데리고 가실 시점을 잠시 미루신 모양이오. 당신을 보고 가기를 신이 원하셔서 허락하셨소.”

알려진 바와 같이 포토카는 죽음을 눈앞에 둔 쇼팽의 청으로 그에게 헨델의 아리아를 불러주었다. 몽테뉴(Montaigne)가 수상록(Essais, 1580)에서 지적했듯, 죽음은 그 자체보다 실은 죽음의 전조인 고통이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쇼팽에게는 그 고통조차 음악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리스트(Liszt)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녀의 음성은 운명적으로 음악가의 심장을 떨리게 했다. 지상에서 가장 달콤할 그 소리는 음악가의 귀에서 천사의 서정시의 첫 화음과 합쳐질 때까지 이별하는 영혼을 수행했다.”

보름이나 연기된 쇼팽의 장례식

꽃을 무척 좋아했던 쇼팽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꽃으로 덮어줬다. 쇼팽의 장례는 쇼팽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Requiem)이 장례미사곡으로 선택됐다. 쇼팽의 오랜 친구이자 여성 성악가인 폴린느 비아르도(Pauline Viardot-Garcia, 프랑스 소프라노, 1821-1910)가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뜻하지 않은 장벽에 부딪혔다. 파리 대주교가 관례상 여성이 노래를 부를 수 없다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성차별이다. 새삼 조르주 상드가 얼마나 배포 큰 여장부였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어쨌든 이에 따른 줄다리기 때문에 장례는 보름이나 연기됐다. 결국, 파리 대주교가 양보해 10월 30일에야 파리의 마들렌(Madeleine) 성당에서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래서 레퀴엠의 솔로 부분은 당대의 대 성악가 폴린느 비아르도, 카스테얀(Jeanne Anais Castellan, 프랑스 소프라노, 1819-1858), 라블라체(Luigi Lablache, 이탈리아 남성 성악가, 1794-1858)가 불렀고 쇼팽 자신의 ‘장송행진곡’과 ‘전주곡 4번’도 연주됐다.

↑ 왼쪽부터 비아르도, 라블라체, 카스테얀↑ 왼쪽부터 비아르도, 라블라체, 카스테얀


쇼팽의 심장은 어떻게 해부되어 옮겨졌을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쇼팽은 평생 조국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 폴란드인들에게 쇼팽은 폴란드의 상징이었고 정신적 위안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쇼팽은 임종을 지킨 누이 루드비카에게 유언을 남긴다. “나의 몸은 프랑스 파리에 있지만, 나의 심장은 조국 폴란드와 늘 함께했어. 내 심장을 조국 폴란드에 묻어줘.” 루드비카는 그의 유언을 이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쇼팽이 파리의 페레 라셰즈(Pere-Lachaise) 묘지에 묻히기 전에 쇼팽의 심장을 꺼내야만 했다. 마침 장례식은 파리 대주교가 여성 성악가의 레퀴엠 솔로를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지연되고 있었다.

쇼팽의 시신 앞에 메스를 손에 쥔 집도의의 얼굴은 극도의 긴장으로 굳어졌다. 루드비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쇼팽의 가슴이 조심스럽게 절개됐고 심장이 꺼내어졌다. 쇼팽의 심장은 잘 소독된 크리스털 단지에 넣어져 밀봉됐고, 다시 마호가니와 참나무 단지에 담겨 루드비카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파리 대주교가 마음을 바꿔 여성 성악가의 레퀴엠 솔로를 승낙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장례가 시작되기 전에 쇼팽의 절개된 가슴은 다시 잘 봉합됐다. 심장이 없는 쇼팽의 시신이 눕혀질 파리의 페레 라셰즈(Pere-Lachaise) 묘지에는 폴란드의 흙 한 줌(녹턴 4번 참조)이 뿌려졌다. 그가 조국 폴란드를 떠날 때 사람들로부터 받아 간직해온 흙이었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졌다. “여기 파리 하늘 아래 그대가 잠들고 있으나, 그대는 영원히 조국 폴란드의 땅 위에 잠들어 있노라.”

이제 문제는 어떻게 파리에서 바르샤바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출입국 관리의 눈을 피해 쇼팽의 심장을 옮길 것인가에 있었다. 루드비카는 고심하며 해를 넘긴다. 그리고 1850년 초에 루드비카는 쇼팽의 심장을 담은 단지를 그녀의 망토에 숨기고 출국을 단행한다.

다행히 출입국 관리들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한 루드비카는 거의 30년 동안 동생의 심장을 보관한다. 1879년이 되어서야 쇼팽의 심장은 마침내 바르샤바의 성 십자교회(Holy Cross Church)에 안치된다.

1918년 폴란드가 독립했을 때 성 십자교회는 쇼팽의 심장과 함께 이미 폴란드인들에게는 성지가 되어있었다. 쇼팽이 바로 폴란드였고 폴란드가 쇼팽이었기 때문이다.

나치의 침공을 피해서

독일 나치가 폴란드를 지배하던 당시 쇼팽의 심장은 위기를 맞았다. 폴란드인들에게 쇼팽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아는 나치는 쇼팽의 곡이 연주되는 것을 금지했고, 그의 동상도 파괴했다.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초까지 이어졌던 ‘바르샤바 독립투쟁’ 중에 나치는 성 십자교회에 침입해 교회 안의 사람들을 모두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교회는 폐허가 됐다.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본 사람들은 그 처참한 현장을 기억할 것이다.

쇼팽, 녹턴 20번 : 달콤한 애수
다행히 그 전에 쇼팽의 심장은 옮겨졌다. 나치의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한 주교가 옮긴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쇼팽의 심장은 나치의 악명 높은 고급 에스에스(SS) 장교 하인즈 라이네파스(Heinz Reinefarth 1903-1979)의 손에 들어갔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등장했던 그는 쇼팽을 숭배한 독일 장교였다. 그래서 쇼팽의 심장은 잔인무도하기로 악명 높은 친위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Erich von dem Bach-Zelewski, 1899-1972)의 본부로 이관되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처했다.

에리히 폰 뎀 바흐는 ‘바르샤바 독립투쟁’을 진압한 후, 폴란드인들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쇼팽의 심장을 정치에 이용한다. 바르샤바의 주교에게 쇼팽의 심장을 이양하는 위선적인 이벤트를 벌인 것이다.

↑ 하인즈 라이네파스(좌), 에리히 폰 뎀 바흐(우)↑ 하인즈 라이네파스(좌), 에리히 폰 뎀 바흐(우)
바르샤바 주교는 행여 나치가 마음을 바꿀까 우려하여 쇼팽의 심장을 곧장 바르샤바 외곽의 밀라노베크(Milanowek)로 숨겼다. 이때 쇼팽의 심장을 사람들이 목격했는데 매우 컸다고 전해진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쇼팽이 사망한 지 96년째 되던 1945년 10월 17일, 쇼팽의 심장은 폴란드인들의 감격 속에 마침내 바르샤바의 성 십자교회로 돌아온다.

쇼팽 사후, 그의 유물 중에서 발견돼 1895년에 출간된 녹턴 20번은 ‘피아니스트’에서 들을 수 있는 쇼팽의 여러 명곡 가운데 하나이다. 바이올린 등 현악기로도 편곡돼서 널리 알려진 이 곡의 달콤한 애수(哀愁)는 설명이 필요 없다.

△ 영화 '피아니스트' 중에서



△ 영화 '피아니스트'의 실제 주인공 Szpilman의 연주
http://youtu.be/n9oQEa-d5rU

△ 사라 장의 바이올린 연주



☞ 본 기사는 딱TV (www.ddaktv.com) 에 7월 19일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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